어려울 건 없는데 어렵네
독일 준비의 꽃은 서류입니다.
내가 어느 나라의 시민인가에서부터 어떤 일을 했고, 어떤 면허가 있으며, 그것의 진의 여부까지.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당연한 것이 이방인이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됩니다. 집은 돈을 주고 구할 방법이 있었으면 서류는 온전히 제 몫이었고 진짜 피말렸습니다.
의사 면허증을 인정받기 위한 서류 준비 과정에서 이미 독일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두 분의 블로그가 많이 도움이 되었는데, 전반적인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https://m.blog.naver.com/twmine
그리고 일본 의사 면허 준비 Daum 카페의 서류작성 예시들이 있어서 꽤 도움이 되었고요.
일단, 한국 면허증은 당연히 한국에서만 효력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한국은 제3 국으로 분류됩니다. 한국 의료 시스템이 국제적 명성이 높다고 할지언정, 독일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면허입니다. 대신 유로연합국에 속해있는 나라인 독일에서 면허가 인정되면 유로연합국을 비롯한 EEA 국가 어디에서나 인정이 되므로, 나중에는 저도 면허가 인정된다면 유럽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겠죠.
독일은 제3 국의 면허의 진위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과정 전체가 독일의 의료 교육과 동등한 수준인 지, 그만큼 수련했는지를 확인한 뒤 면허를 인정해 줍니다. 이것을 '동등성(Anerkennung)' 입증평가라고 부릅니다. 독일은 주 연방이기 때문에 필요한 서류가 '주'마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은,
1. 의과대학을 다녔다는 증거(성적표와 졸업장), 의과대학 수업 내용(커리큘럼, 학업개요), 총 수업 시간(뭐 이런 걸 준비하나 했는데, 일본 면허 인증받을 때도 총 수련 시간이 중요함), 국가시험 통과 여부(국시원 합격 인증서), 면허증, 면허 증명서(면허가 아직 유효한가), 인턴 세부 내역서(임상에서의 최소 경험 여부) : 여기까지가 의사 면허 인정 과정이고,
2. 전공의 수련 내역(커리큘럼, 수련 시간, 논문, 수련 항목 등), 전문의 자격증, 전문의 자격 증명서(면허가 안 잘리고 잘 살아있나), 세부 전문의 자격증, 경력 증명서 : 이게 전문의 인정 과정에 필요한 서류입니다.
그 외 기본적으로 나의 신분 확인을 위한 여권, 가족 관계 증명서, 기본 증명서(처음 알았는데 이런 게 있습니다), 범죄 경력 회보서(범죄자 유무)가 필요합니다. 서류 종류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한 블로그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도합 19가지의 서류 중 공문서는 가족관계증명서, 기본증명서, 의사면허증, 전문의 자격증, 의사면허 증명서, 전문의자격증명서, 범죄경력회보서이고, 그 외는 모두 사문서입니다. 발급이 쉬운 공문서는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정부 24와 동사무소에서는 하루 안에, 보건복지부는 1주일 안에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까다롭다고 해봤자, 제출 시점으로 3개월 이내의 서류여야 하는 범죄회보경력서나 의사면허증명서 정도였는데, 출국 2주 전에 신청하여 출국 1주 전에 아포스티유받고 번역을 맞기느라 시간이 조금 빠듯한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사문서였습니다. 의학전문대학원, 인턴수련 병원, 전공의 수련병원, 전문의 근무 병원이 모두 달랐던 저는 4곳에 각각 연락해서 서류를 받아야 했고, 대학원의 수업시수 증명서, 인턴수련 세부 내역서, 전공의 세부내역서, 전문의 세부내역서는 없는 양식의 문서이기 때문에 제가 직접 만들어서 각 병원과 학교에 공문화를 부탁드렸습니다. 당연히 학교와 병원 측에 서류발급을 요청했을 때 곤란스러워하셨습니다.
Daum 카페 후기에서 '3개월 여유를 가지고 준비하세요' 라길래, 넉넉히 3개월인가 했는데 빨라야 3개월입니다. 7월에 처음 연락을 돌렸는데 10월 말쯤 추석이 지나고 나서야 모든 서류가 완성되었습니다. 서식이 존재하지 않는 서류는 낯낯이 검토한 다음에 학장 혹은 병원장에게 직접 직인을 받아야 합니다. 의학전문대학원에서는 졸업한 지 10년도 넘은 졸업생이 학교에 다닐 당시의 수업 시수에 대한 인증을 부탁하니 난감하셨겠죠. 하지만 저도 꼭 필요한 상황이라 학과 사무실과 서류 작성 가능 여부로 독일어로 된 공문을 보내고, 직인에 대한 학교법규를 찾아보고 이러쿵저러쿵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1달째에 주임분이 제 케이스를 이어받아서 학과장님 디렉트로 사인을 받아주셨습니다.
학과장님 면담이 가능한 갓 졸업한 학생이라면 오히려 빨랐을 텐데, 졸업한 지 거의 10년째인 저 같은 경우엔 학과 사무실을 통하는 방법뿐이 없었습니다. 종례에는 서류를 잘 인계받고 마무리 지을 수 있었지만, 매일 화요일 오전 전화해서 물어보는 게 서로에게 고역이었습니다.
대학원과 한바탕 하고 나니 3곳의 대학 병원도 더하면 더했지 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권력의 힘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전공의와 전문의 당시 근무 세부 내역이 담긴 서류를 전공의 수첩(각 전공의의 수련내역은 각과 협회에서 보관합니다)과 세부 전문의 자격 요건을 토대로 각 교실 과장님께(응급의학과와 소아과) 직접 부탁드렸고, 흔쾌히 교실을 통하여 병원장에게 문의드려 주셨습니다. 교실을 통해 공식으로 요청되었기 때문에 처음엔 난처해하던 행정직원분들도 큰 무리 없이 발급해 주셨습니다. 인턴은 학과 소속이 아니라 '수련부 소속'이며 수련부는 개별적으로 작성된 서류 발급은 어렵다고 하여서, 수련 시간이 적힌 서류 대신 어떤 과에서 수련했는지 적힌 세부내역서로 대체하여 발급받기로 했습니다. 인턴 경험이 중요하므로 시수가 적힌 서류를 받고 싶었지만 저 당시 서류 발급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라 그냥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발급만 받으면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서류를 외국에서 인정하도록 만들어봅시다.
모든 서류를 줍줍 하여 완성시키고 나니 출국 2주 전이었습니다. 이제 공증과 아포스티유를 받으러 가야 합니다. 아포스티유라는 것은'이 문서가 한국에서 발급받은 공문서이며 이것이 (협약을 맺은) 다른 나라에서도 유효하다'라고 재외동포청에서 인증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공문서가 '해당'나라의 공문서만큼 효력을 가지게 하는 단계이죠. 공문서는 외교부, 사문서는 변호사 공증받고 법무부 아포스티유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서류를 품에 꼭 안거, 광화문으로 향합니다. 재외동포청이 그곳에 있거든요.
근처의 공증 변호사무실에 가서, 사문서 공증을 받았습니다. 개당 3만 원 정도로, 맡긴 지 10-20분 안에 공증해 주셨습니다. 그다음, 재외동포청에 가서 아포스티유(오전에 가면 오후에, 오후에 가면 다음 날, 10개 이상의 서류는 다음날 발급받습니다. 여유 있게 가세요)를 발급받았습니다. 각 서류당 천 원씩이고, 현금 결제만 가능하니 현금가 져가세요.
아포스티유는 서류윗면과 뒷면을 감싸는 모양의 스티커 형식으로 발급되는데 찢어지면 효력이 없습니다. 재외동포청 직원분께 '테이프 붙여서 보호하면 안 되냐고' 물어봤더니 그게 더 수상해 보이니 그냥 잘 간수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날 비가 왔는데, 서류 젖지 말라고 저는 비 맞고 서류는 잘 간수해서 집에 왔습니다.
모든 서류가 외국에서도 효력이 있게 만들었으면, 마지막으로 외국인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해야 합니다.
독일의 정부기관은 제출할 서류에 대해서,
1. 서류 원본
2. 독일어가 아닐 경우, 독일의 공증 번역가가 번역한 공증 번역 사본
을 요구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한국에서 공증번역받고 아포스티유 받아도 돼 ~'하는 경우, 대학 입학이나 다른 분야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의사 면허증에는 해당되지 않음을 강력히 말씀드립니다. 반드시 '독일 거주하는', '공증 번역가'에게 문의해야 합니다. 왜? 왜 따위는 없습니다. 독일 정부기관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요. '이러면 안 될까?'가 아니라 '이것밖에 안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류를 준비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습니다. 따라서 위의 루트를 타는 게 가장 안전하고 반려받지 않고 돈을 두배로 쓰지 않을 확실한 방법입니다.
저는 10월 즈음에 번역가분께 문의드렸었고, 서류가 완성될 때마다 스캔을 떠 미리 번역을 부탁드렸습니다. 개략적인 견적을 내고, 11월 말 독일에 도착해서 원본을 우편으로 공증 번역가님께 보내서 원본 대조 후, 완성된 번역 사본과 원본을 직접 픽업했습니다. 공증 번역의 경우 도장의 모양, 요철 여부 등 모든 것을 서류에 기재해야 하기 때문에 번역가가 스캔본이 아닌 원본서류와 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편으로 주고받기엔 세상에 한 부 밖에 없는 서류들이라 잃어버릴까 봐 직접 픽업해 왔습니다.
공증 번역에 대해선 한 줄로 요약했지만 번역가를 찾고, 문의드리고, 서류를 주고받는 과정이 굉장히 길고 끝이 없더군요. 이렇게 모든 서류준비는 여름인 7월에 시작하여 다음 해 1월, 딱 반년 걸렸습니다.
정리하면,
1. 공문서 중 기한이 있는 서류는 시기를 조절하여 발급받습니다. 면허 증명서 / 자격증 증명서는 1주일 정도 걸리고, "Certificated in good standing"이라는 문구는 영문판에만 들어가니 영문으로 발급받으세요.
2. 사문서는 과장님 등 윗 분께 연락드려 편의를 부탁드리는 방법이 정신 건강에 이롭습니다.
3. 사문서 공증은 어떤 변호사 사무실을 가도 비슷하니 아무 데나 가서 빠르게 받으세요. 광화문에 많습니다.
4. 공증과 아포스티유는 대리인 맞길 필요 없고 하루만 투자해서 광화문 투어 하시면 됩니다.
5. 아포스티유 받은 서류는 스캔하려면 지하 1층 복사실 가라는데 그냥 무인 프린트카페에 가서 오징어 굽듯이 잘 잡고 혼자 하세요. 복사실은 한 페이지당 천 원인데 혼자 하면 백원도 안 냅니다.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으면 복사실에서 하시는 것 보고 따라 하거나 복사집에 '스티커 안 떼지게 스캔해 주세요'하고 부탁드리면 저렴하게 할 수 있습니다.
6. 한글에서 독일어로의 번역은 비용이 정말 많이 듭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엔 한국어로 발급받아야겠지만, 될 수 있으면 영어로 발급받으세요. 영어에서 독일어로의 번역은 번역가가 많아서 저렴하고 빠릅니다.
(>>사문서는 제외! 사문서는 변호사 사무소에서 공증을 받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한글이 들어갑니다(겉장이나, 공증 확인문이 영어+한국어로 동시표기되요. 독일 ’여성, 건강청‘에 ‘이정도는 봐주면 안되냐’고 물어봤는데 안된다고 까였습니다.)
혼자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독일로 건너오려면 서류 준비에서 학을 뗄 겁니다. 영어권의 나라는 중개인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유럽권은 있더라도 가격이 상당합니다. 혹시라도 독일행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행운을 빕니다.
*다음은 ‘결심을 말해본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