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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긴 것과 남길 것들

짐을 정리해 보자

by 포테토칩 Feb 26. 2025

*본 내용은 휴대전화 화면에서 가독성이 좋습니다


 서류 준비는 얼추 마무리가 되었고, 주변 정리도 착착 진행되었으니, 이제는 저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출국이 한 달 남은 시점이었습니다. 본가와 직장 숙소를 오갔기 때문에 방 2개에 퍼져있는 '나'에 작별을 고하거나, 가지고 가야 했습니다.


 짐정리에는 당근마켓이 최고입니다.

숙소의 짐은 적은 줄 알았는데, 비워줄 때가 되니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키우던 식물들은 나눔 했고, 토스트기, 캡슐커피머신, 돗자리, 선풍기 같이 작은 물품들은 올리자마자 연락이 오는 족족 판매했습니다. 부피가 큰 것들(매트리스, 침대틀)은 저렴하게 올려도 의중만 계속 떠보고 구매가 이뤄지지 않길래, 열받아서 대형 폐기물 처리비용으로 당근마켓에 올리고, 1주일 기다렸다가 폐기물 처리했는데, 누군가 수거하기 전에 가져가셨더라고요. 폐기물 수거 비용은 반환되었습니다. 2인 소파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부르시길래(5000원), 제 차에 실어서 본가에 가져다 놨습니다. 부피가 큰 제품들은, 무료 나눔 시 되파는 일들이 종종 있다고 했던 게 생각나 좀 씁쓸했지만, 당근으로 25만 원 정도 짭짤하게 벌었습니다. 남은 짐들과 내 소파를 소형 SUV안에 싣고,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본가로 출발했습니다. 아듀, 나의 직장.


직장 숙소야 원래 짐이 적었으나 그렇다 쳐도, 본가에 있는 짐이 문제였습니다. 10년도 더 된 책상과 침대, 옷장을 보내줘야 할 때가 되니,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보다 더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것저것 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생기다 보니, 오히려 짐이 점점 쌓이더군요. 결국 독일에 가져갈 캐리어 2개와, 여름 짐을 담은 박스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처분하였습니다.


짐을 고르는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꼭 필요한 것들은 품목당 여분 1개까지 총 2개로 제한했습니다. 물론 저렇게 해도, 쓸데없는 걸 가져왔지만, 많이 줄일 수 있었습니다. 옷은 최대한 간단히 챙겨 운동복과 평상복 3-4벌, 운동화 2켤레, 슬리퍼 1개만 챙겼습니다. 속옷과 양말은 크기 문제로 최대한 챙겼지만, 이 기회에 싹 갈아 새것들로만 추리고 다 버렸습니다. 비싸서 그동안 버리지 못했던 옷들, 부피감이 커서 버리지 못하는 코트들은 헌 옷수거함에, 근무복은 2벌 외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습니다. 그동안의 시간을 버리는 것 같아, 슬플 줄 알았는데 버림의 쾌감이 굉장히 크더군요. 독일 와보니, 옷은 그냥 윗도리 서너 벌과 청바지 두어 개 돌려 입기 때문에 더 챙길 필요 없습니다. 신발도 편한 것 하나, 포말 한 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화장품과 향수는 어차피 쓸데없으므로 다 버리고(부모님이 방향제로 쓴다고 가져가심) 며칠정도 분의 여행용 스킨제품만 챙겼고, 혹시 전자제품 액세서리가 비쌀까 봐 충전 케이블만 좀 챙겼습니다. 그리고 개인 용품과 사무용품(독일 사무용품 안 좋으니 얇은 잉크펜 많이 가져오세요)을 챙기니 의외로 자리가 남았습니다. 남은 자리엔 자른 미역(부피대비 굉장히 좋음), 브리타(집에 있었음) 통, 와인잔세트(가장 오랫동안 고민했으나 저에게 의미 있는 것이라 가져왔는데 의외로 만족하고 있음)를 넣어왔습니다.


여행과 다르게 장기 거주를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포장 이사를 할 게 아니면 필수용품만 가져와도 될 것 같습니다.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다 독일에서 살 수 있으니까요. 아시아 마트도 잘 되어있어서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식재료도 대부분 구할 수 있습니다(깻잎은 없음). 그러다 보니 필수용품을 챙기고 남은 공간에 독일에는 없는, 사지 못하는 제 추억이 담긴 것들을 담았습니다. 추억을 추릴 땐, 내가 그 순간을 기억을 하기 위해 남겨뒀던 것들은 모조리 버렸습니다. 어차피 평소에는 생각이 안 난다는 것이니까요. 트렁크와 여름 택배에 들어갈 짐들을 빼고 나니, 남긴 2벌의 근무복과 청진기, 작은 추억들이 우체국 3호 박스 하나에 다 담겼습니다. 짐, 생각보다 별로 없었습니다.

많을 줄 알고 박스두개샀는데 하나는 아예 쓰지도 않았다.

남은 물건들은 나눔 하거나, 폐기 처리하였습니다. 대학생부터 썼던 책상형 PC와 모니터 두 개는 호환문제로 쓰지 못하고 집 창고에 대기하다가 좋은 곳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동안 나를 태워준 나의 작은 흘기(소형 SUV)는 동생에게 보내주었으며, 책들은 가능하면 알라딘 중고서점에 재판매, 나머지는 기부하거나 스캔을 떠서 소장했습니다.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선호하지만, 부피와 무게 때문에 친구가 챙겨준 독일어책 하나(두고 올걸) 빼고 다 처분했습니다. 그래도 국회도서관 등 전자책을 빌릴 수 있는 곳들이 꽤 많아서 한글로 된 책을 해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가져온 것들 중 후회한 것은 식기류(젓가락 없을 줄 알았음), 충전 케이블, 여유분의 신발, 수비드기계(진짜 왜 가져왔을까)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살 수 있지만, 고가일까 봐 가져왔던 것들이었는데 여기서도 필수생활용품은 저렴합니다. 노트북이나 아이패드 정도 아니면 굳이 고가 전자기기나 주변용품 사 오지 마세요.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짐들이 꽉 챙기고 나서도 폐기물 쓰레기로 마대자루 2-3개 정도 나와, 긁어모아 가져다 버리고 나니 진짜 출국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여행 가는 것과는 다르게 계속 짐을 쌌다 풀었다 했는데,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함이 아니라 덜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나까지 정리하고 나니, 진짜로 한국을 떠나는 게 실감이 났습니다.


*다음은 '첫 번째 삶을 마무리하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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