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는 환자가 보통 집에 격리되고, 접촉자 또한 한국처럼 동선을 파악하여 세밀하게 추적되지는 않고, 격리할 것을 권고받는 수준이다.
다소 느슨한 정책 때문에 스웨덴은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은 인구당 사망자를 가지고 있지만, 스웨덴에서도 배울 점은 있다.
스웨덴에서 배울 점은 코로나 상황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느냐이다.
스웨덴 언론 svt의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관련 페이지
스웨덴 svt에 해당하는 KBS의 코로나바이러스 페이지
스웨덴의 헤드라인을 간단하게 번역하면 "직접보고: 코로나19로 새로운 1명의 사망자", "여러 지방정부에서 18세 이상 접종 예약 시작", "그래픽: 얼마나 많은 사람이 중환자실(IVA)에 있는지" 정도이다.
스웨덴의 헤드라인 어디에도 확진자가 얼마나 발생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중환자나 사망자의 수에 집중해서 보도하고 있다.
물론 코로나 초기에는 확진자 수도 중요한 지표에 해당할 수 있었다. 항체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 없으므로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고르게 걸리게 되고, 고령층의 높은 사망률은확진자와 사망자 간의 명확하고도 무서운 비례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 선진국들이 고령층에 대한 백신 접종을 끝낸 지금, 더 이상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진자는 늘어나는데 사망자는 정체하거나 심지어 줄어드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3만 명 가까이 신규 확진자가 쏟아져 나오는 영국의 사망자 수는 안정되어 있고, 우리나라 또한 최근 환자가 급격하게 늘어났지만 사망자 수는 안정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코로나 초기에는 유효했지만, 아직도 확진자 수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난 사회적 갈등과 이에 따른 비용, 그리고 신뢰 상실은 한국 사회에 앞으로 커다란 상처로 남을 것 같고, 이제는 확진자 수에서 벗어나 중증 환자와 사망자 수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1. 확진자에 대한 낙인
한국에서 코로나 환자는 피해야 할 대상이다. 매일매일 확진자 수가 보도되고, 이것이 대중에게 피로함을 줌으로써 확진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된다.⁸
이런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시선은 일부 종교시설이나 이태원 클럽 등의 집단감염 사례에서 일부 환자의 행동 때문에 더 심해졌고, 코로나에 걸리면 직장에서 징계가 된다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가져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16만 명의 무책임하고 몰지각한 사람들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아니면 적어도 확진자 수 세기가 끝낼 때까지 계속해서 추가로 생길 것이다)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확진자에 대한 시선이 더 부드럽다. 중증이나 사망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사회에 다시 복귀한 사람은 축하와 위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스웨덴에서도 "조금 더 조심하지 그랬냐"라는 시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국에 비해서는 훨씬 부드러운 편이다.
확진자 수에 집착함으로써 생긴 사회적 갈등은 엄청나다. 중증 환자나 사망자를 욕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쉽지 않지만, 확진자를 욕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확진자가 무증상이었다면 더 괘씸하다.(확진자들때문에 마스크 쓰기 등 수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데 확진자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니)
물론 욕먹는 것이 두려워서 방역 수칙을 지키는 사람이 일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 신뢰에 금이 가고, 엄청난 갈등과 반목을 양산하는 비용을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는 걸까?
2. 젊은 층에 대한 백신 접종 논쟁
한국에서는 확진자 수가 가장 큰 관심사이고, 확진자 수 줄이기가 지상과제가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최근 확진자 증가의 원인인 젊은 세대에 대한 비난이 쇄도하고 있고, 젊은 세대는 왜 우리에게만 그러냐라는 반응을 보이며 세대 간 갈등이 깊어지고 있고, 한쪽에서는 확진자 수를 줄이기 위해 고령층보다는 젊은 층에 먼저 백신을 줘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확진자 수를 줄이기 위해 젊은 층에게 백신을 먼저 줘야 한다는 주장을 듣고 개인적으로 소름이 끼쳤다. 확진자 수를 줄이기 위해 사망자 수를 늘리자는 말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 활동이 적은 고령층보다는 사회 활동이 왕성한 젊은 층에게 먼저 백신을 준다면 환자 수를 줄이는 데는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체가 없는 고령층은 걸리면 큰 확률로 중증 혹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확진자는 줄지만 사망은 크게 줄지 않게 될 것이다.
젊은 층은 걸려도 중증이나 죽음에 갈 확률은 매우 낮으며, 후유증 또한 모두가 겪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 걸린 사람(모두 외국에 있는 친구들이기는 하다) 6명을 알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후유증을 겪지 않고 있다고 한다. 물론 내가 모르는 누군가는 후유증을 앓겠지만, 그것이 죽음보다 중요할까?) 오히려 코로나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무증상이 있을 만큼, 젊은 층 대부분에게는 가벼운 감기 정도로 지나간다. 즉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는 가벼운 감기라는 점이다. 그럼 감기와 유사한 수준의 질병의 확진자 수를 줄이기 위해 막을 수 있는 죽음을 감수하는 게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물론 감기 수준이라는 것은 젊은 층에만 해당한다. 노인에게는 분명 심각한 질병이다)
환자 수를 줄이기 위해 젊은 층에게 백신을 주자는 주장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사악하고 소름 끼치는 주장처럼 들린다.
최근 코로나 확진자 수가 늘어나며 각종 방역 조치가 강화되고 있고, 이에 따라 시민의 자유도 제약받고, 자영업자 또한 고통을 받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금의 상황이 방역 조치를 강화할 정도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공보건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코로나라는 하나의 질병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확진자 규모는 더 커졌지만, 병상이 가득 차서 집에서 입원도 못한 채로 죽어가던 사람이 있던 작년보다 코로나 자체의 부정적 영향은 작다. 오히려 확진자 수 집중에서 일어나는 사회갈등 등 다른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고 느껴질 지경이다. 방역을 강화하면 확진자 수는 줄일 수 있겠지만, 이것이 다른 부정적 영향을 감수할 정도로 가치 있을까?
가령, 최근 유아층은 언어 발달이 늦어지고 있으며, 초중고등학생들의 교육 격차는 양극화 수준으로 벌어졌고, 대학생 또한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고 있다. 이들을 아이로 둔 부모들 또한 걱정과 신음으로 가득찬 하루를 보낸다.
취업준비생 또한 취업이 늦어져 인생 계획이 틀어지는 등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고, 자영업자는 매출 감소로 신음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측면, 아동/청소년 발달 면에서의 부정적 영향은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면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정당화될 수 있다. 생명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이고 어떤 희생을 통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진자를 줄이기 위해서" 이러한 희생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것도 무증상이나 약한 감기와 같은 경증이 대부분인 환자를 줄이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코로나 대처를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생각한다.
확진자 증가는 죽음과 동의어였고, 때문에 죽음과 확진자 증가를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며 이는 수치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백신으로 코로나에 취약한 사람들이 보호를 받기 시작해서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의 비례관계가 깨진 지금, 단순히 확진자 수에 집착하는 정책은 조금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더 나쁜 수치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깎이지 않았고, 코로나로 인한 갈등이 상대적으로 작았던 스웨덴이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방역정책을 이끌었던 공공 보건국 국가역학자 안데스 테그넬(좌), 부국가역학자 카린 테그마르크 뷔셀(우), 총리 스테판 뢰벤
생태계는 하나의 동물이 멸종하면 다른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회 또한 여러 가지가 모두 상호 영향을 끼친다.
코로나의 환자 수를 줄이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코로나 수를 줄이기 위한 조치들이 역효과가 더 크다면, 이는 절대 옳지 못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