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1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떠난, 혹은 떠나 온.

by 김민석 Feb 04. 2025

 추운 겨울의 날씨 덕에 아주 시원한 상태로 커피 배달에 성공했다.(거리가 짧기도 하였고) 식사를 내어주었고, 숙소를 잡아주었고, 일자리까지 알아봐 준다는 젊은 부부는 단 커피 두 잔에서 큰 행복을 느꼈다. 분명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자 하니 나마저도 행복이 전염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영업준비를 뒤로 한 채 튀어나왔고 나는 그들을 보던 중 문득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10시 25분이었다. 이들의 영업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서둘러 인사를 한 뒤 급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제 겨우 일어난 지 겨우 3시간 남짓 지나 있었다. 노동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피로를 느꼈다. 조금은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숙소로 향했다. 몸을 몇 바퀴 돌리면 닿을 만큼 짧은 거리였지만 어제와 오늘 눈에 띄지 않았던 풍경들도 새로 담을 수 있었다.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이곳의 일상. 눈을 뜨고 나갈 채비를 하고 각자의 일터로 향하거나 딸기 비닐하우스에 가기도, 누군가는 그저 산책을 하기도 했다. 정리가 부족해 보이는 여러 농기구들 또는 투박하게 쌓여 있는 포대자루들. 집을 지키려는 것인지 그저 사랑받으려는 것인지 모를 진돗개나 여러 품종이 섞인 개들. 일상이란 것이 무릇 특별한 것이 아니겠지만 서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잔잔한 풍경들이었다. 자꾸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곳은, 자꾸만 괜스레 나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궁금한 것이 생겼다. 만약, 이러한 일상이 나의 것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내가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일상을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생겼다. 그저 떠나온 여행이 주는 선물인 것인지 혹은 떠나온 이유인 것인지에 대하여. 깊은 생각은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냈다. 찰나 같았던 귀갓길은 끝이나 있었고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갔다.


 나는 마치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온 인간과 같은 상태로, 아침에 정리하지 않았던 이부자리에 대자로 뻗었다. 두 눈은 높지 않은 천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별생각 없이 천장의 얼룩들을 좇았다. 천장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를 먼 기억에서 조차 찾기 어려웠다. 보통은 휴대폰을 보거나 텔레비전을 통한 영화를 시청하거나 책을 읽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릴 적에는, 그러니까. 누가 보아도 어린아이로 보였던 그 시절에는 천장에 달이나 별 모양의 형광을 붙여 놓았기에 자주 올려다보았던 기억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정말, 이곳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추억 여행 떠나기’를 도와주었다. 내가 떠나 온 여행이 아닌 말 그대로 추억 여행. 그리고 난 여행을 결심하기 전 날에 다녀왔던 카페가 떠올랐다. 내가 읽으려고 구입했던 그 책이 한동안 먼지만 쌓여 있었던 것을 말이다. 좋아하는 교수님의 책이기도, 제목이 마음에 들기도 하여 선뜻 구매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어려운 철학 용어들과 작가의 수준 높은 필력은 타자(나)의 침입을 쉽사리 환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오래 덮어두었던 책을 그녀는, 나와 이별 후에 읽었다며 내게 읽었느냐고 물었다. 헤어진 후 처음 마주하게 된 바로 그날. 그녀가 내게 건넸던 첫 질문이다. 그땐 별생각 없이 아직 읽지 않았다고만 답했다. 그것이 너와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고, 책을 미리 읽어 두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 애초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책을 미리 읽어 두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 거야.’라고 분명히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저 그것을 한동안 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알고 그때는 몰랐던 것뿐이다. 순간, 이 깨달음이 나의 전유물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맞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왜 이리 오래도록 가지고 있던 것일까?’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었고 그녀와의 이별은 분명했으며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한 2년의 짝사랑은 사랑이 아닌, 이별 여행에 지나치지 않았다. 아니지, 정확한 이별여행이었다. 지금 떠나 온 여행은 그녀가 남긴 산물이다. 일말의 기대가 없던 상쾌함이 몰려왔다. 오랫동안 방치했던 집안을 빛이 나게 청소한 것처럼. 먼지가 쌓인 책이 술술 눈에 담기는 것처럼. 빈 공간이 없던 지하철에서 뻥 뚫린 출구로 나온 것처럼. 회색 빛 도시에서 자연의 빈도가 높은 외곽으로 떠나 온 여행처럼.

화요일 연재
이전 07화 평범한, 어쩌면 특별한.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