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습일지 #나도 자연인이다

대화의 기술,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

by 시크팍


방송사마다 그 회사를 대표하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지상파야 대표작이 워낙 많지만 종편이라면 대표 프로그램의 역할이 더 크다. 미스·미스터트롯, 하트시그널, 강철부대, 아는 형님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MBN은 <나는 자연인이다>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우리 아버지도 자연인 애청자였다. 종종 주말에 집에 내려가면 항상 TV에는 나는 자연인이다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자연인은 특히나 장년층 남성들에게 그저 로망 그 자체인 것 같다.


마와리를 돌며 만난 여러 경찰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든 들어가 MBN 수습이라고 인사를 하면 나는 자연인이다 이야기부터 꺼내시는 분들이 있다. 대부분 정년퇴직이 몇 년 남지 않은 분들이었다. 이분들과의 첫 대화는 자연인으로 시작해서 자연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자연인 프로그램을 제대로 시청해 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아버지가 보실 때 잠깐씩 같이 보거나, SNS에 올라온 짤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마와리를 돌며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아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앞에서는 나도 자연인 애청자였다. 생선 대가리 카레, 고라니 사체를 먹은 짤, 곱등이밥 등 그동안 짤로 봐왔던 자연인 스토리를 마치 시청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애청자인 아버지까지 함께 이야기하면 금상첨화였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퇴직을 앞둔 경찰들은 나를 아들 보듯이 대해줬다.


한 번은 영등포서 관내 지파를 돌며 순찰팀장님 한 분을 뵈었다. 처음 기자라고 신분을 밝혔을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곳도 명함만 전달하고 나가야겠구나 싶었는데, 팀장님께 명함을 건네니 표정이 바뀌었다. 원래는 기자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MBN이라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며 자연인 애청자임을 밝히셨다. 김명준 선배의 뉴스파이터도 즐겨 보신다고 했다. 팀장님은 원래 연락처도 절대 알려주지 않는데 MBN이라 알려주신다며 좋은 사건이 있으면 연락을 주시겠다며 명함도 한 장 더 받아가셨다.


강서서를 돌며 만난 파출소장님 한 분도 뉴스파이터 애청자셨다. 처음 파출소에 들어갔을 때 근무자들은 냉랭한 반응을 보였지만 소장님이 들어오셨을 때 MBN 기자라고 하니 손수 커피도 타주셨다. 뉴스파이터에 자주 출연하는 교수가 말씀을 잘하시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다음에 누구인지 알아오겠다며 다시 방문할 여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회사와 대표 프로그램 덕분에 취재원과의 대화 소재가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운이 좋은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대부분은 대화의 시작도, 끝도 내가 만들어가야 했다. #도살장 가는 길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처음에는 경찰과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몰라 난감했었다.


인간은 역시나 적응하는 동물이었다. 마와리 3주 차 때에는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적절한 대화 주제를 꺼낼 수 있었고, 적당히 시간을 봐서 끝맺는 것도 가능해졌다. 상대에 따라 대화 주제도 다양해졌다. 영등포서 관내 지파를 돌던 중 만난 팀장님 한 분은 자녀분이 내가 졸업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팀장님께서는 자녀분이 언론인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찾아뵐 때마다 학교 이야기와 함께 자녀분의 진로 상담을 해드리기도 했다.


두 번째 라인에서는 장난기가 발동하기도 했다. 수사 기능을 하는 형사과나 수사과 경찰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지하세계에 잠시 몸담았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장난인 것을 바로 알아채는 경우도 있었지만 심각하게 어떤 일을 했었느냐며 묻는 경우도 있었다. 지하철 회사에서 근무했었다고 이야기하면 대부분 안도하거나 재미있다는 반응을 해주었다.


사실 나는 말주변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주로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수습기자 생활을 하며 빠르게 바뀌어 갔다. 누구를 만나도 살갑게 대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끔은 너스레를 떠는 스스로를 보며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괴리감을 느끼며 놀라기도 했다.


짧은 기자 생활이 나의 많은 부분을 바꿔준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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