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좌진의 적은 보좌진이 아니다.
어느 조직이건 아무나 할 수 없는 분야의 일이 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 개발이나, 자동차 디자인, 건축설계 등과 같은 일이다. 생산직 종사자는 계속 생산직으로 종사한다. 반면 사무직 종사자는 전문 자격을 취득하는 등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계속 사무직에 있을 수밖에 없다.
국회 보좌진은 남다른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국회 보좌진이 직접 건축설계를 하거나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은 아니므로, 또 환자를 치료하거나 범인을 검거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전문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일을 할 수는 있어도 전문적인 능력만 가지고는 생존하기 어렵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 국가 투자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국가적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대책의 헛점을 지적해 개선하며 강력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일선 근무자들이 복무규정을 잘 준수하였는지 등을 살펴봐야 하므로 꼭 전문적 기술을 겸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전문 역량이 있으면 좋지만 전문역량만이 전부는 아니다.
국회 보좌진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다.
말 그대로 스페셜리스트는 어떤 한 분야, 상임위를 예를 들어보면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등 관련 상임위를 10년 이상 들여다본 이들이다. 10년 이상 과학기술정보통신 관련 정부부처 일을 감시하면서 공무원들의 일하는 매카니즘이나 업무 우선순위 등을 훤하게 꿰뚫고 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를 소관상임위로 하겠다는 국회의원들에게 가장 1순위 섭외 대상자가 되곤 한다. 국회 일이 입법과 행정부 견제가 주라는 점에서 정책 기능은 빠질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주로 정책 총괄 보좌관들이 스페셜리스트인 경우가 많다.
제너럴리스트는 관점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두루두루 전 상임위에 걸쳐 역량을 발휘하는 이들이다.
의원이 뭘 해야하는지, 어떤 상임위를 선택해야 하는지, 당직은 맡아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해 방점을 찍고 고민하고 의원과 함께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통상 정무 등을 총괄하는 수석보좌관들이 제너럴리스트인 경우가 많다. 제너럴리스트들은 깊이 있는 접근이 필요할 때는 주변 전문가 풀을 활용하곤 한다.
스페셜리스트 보좌진들은 가족, 아동학대, 보육 문제 또는 장애인인권이나 종교 문제 등에 대해 끊임없이 법안을 발의하고 공청회를 하거나 토론회를 하는 보좌진들은 계속 그런 칼라의 의원들과 호흡을 맞춰 일을 하는 모습을 종종 봤다. 반면 제너럴리스트 보좌진들은 한 의원이나 비슷한 가치를 지향하는 의원과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 하는 경우들이 많다.
결국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는 같은 보좌진이지만 결이 다른 보좌진인 거다.
예전에는 제너럴리스트가 더 국회 보좌진다운 거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은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경쟁적이며, 이 둘의 조합이 잘 어우러질 때 그 의원실의 역량은 최대로 상승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국민 생활과 밀접한 법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국회에 입성하지만 내가 우선순위로 생각했던 법이 이런저런 이유로 밀리거나 심사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언론 등을 활용해 왜 중요한지를 설득하고 우선순위로 끌어올리는 역량을 갈구하게 된다.
기업에서 기조실에서 전체 방향을 설정하고 생산직이나 각 부문별 조직이 그 방향에 상호작용을 하면서 시너지가 있듯이 국회 역시 그러하다. 전문성이 떨어지더라도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보좌진이 받쳐주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관점과 통찰력이 뛰어난 보좌관의 디렉션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하지만 정작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다보면 이걸 까마득히 잊는다. 나도 알고 있고 나도 판단하고 내 판단이 옳고 중요하다고 착각한다. 서로를 무시하거나 한심해한다. 제너럴리스트들은 스페셜리스트를 보며 시야가 근시안적이라고 비판하고 거꾸로 스페셜리스트들은 제너럴리스트들을 보며 말로만 그럴싸하게 떠든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서로가 발전하기도 하지만 갉아먹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루고자 하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투쟁인 경우는 그런대로 봐줄만한다.
하지만 의원실 내 입지를 굳히기 위한 전략인 경우 말은 달라진다. 보기 싫은 권력 투쟁 장면이 연출된다.
후배들은 그 싸움에서 이긴 힘있는 자에게 자연스레 줄(?)을 서고 그룹이 형성되면서 끼리끼리 문화를 형성된다. 그 순간 좋게 말하면 경쟁이고 나쁘게 말하면 싸움인 그 상황을 의원이 어떻게 정리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의원은 내치지는 못하겠으니 지역구나 다른 선거캠프 파견과 같은 선택을 해서 상호 떨어뜨려놓기도 한다. 어떤 의원은 어느 한쪽이나 둘 다 그만두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의원은 드물긴 하지만 서로 화해하라고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선택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상처를 남기고 투쟁의 기록을 남긴 채 그 의원의 마음속에, 또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의 뇌리 속에 나라는 인간의 투쟁성을 각인시키며 선입견을 만들거나 살아났았으니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거나 둘중에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국회 보좌진을 감정노동자라고 말한다. 밖으로는 지역구민들이나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안으로는 보좌진들로부터 끊임없이 감시와 견제를 받고 또 그런 매카니즘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국회는 여야가 공존하는 곳이며, 다음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으려 경쟁하는 곳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 활동을 해도 사회를 뒤흔들 비리에 연루된 의원이 나타나면 그 의미는 퇴색된다.
국회라는 공간은 좋은 정책과 동시에 현명한 판단이 매우 중요한 곳이다.
좋은 정책을 만들었으니 아무리 하는 행동과 태도가 마음에 안들어도 선택받을 수 있다는 턱도 없는 믿음을 갖고 있거나, 정책은 아무것도 제시하니 아니하면서 말과 행동으로만 그럴싸하게 해서는 절대 선택받지 못한다. 민심이 그러하다.
보좌진도 마찬가지다. 제너럴리스트가 더 훌륭하다, 스페셜리스트가 더 훌륭하다고 투쟁만 할때, 과연 인사권자인 국회의원으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국회의 직분인 입법과 행정부 감시 기능해 충실한 사람으로서 국민의 녹을 먹는 공무원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보좌진의 적은 보좌진이 아니다. 관점과 통찰을 흐리는 나의 잘못된 욕심이 곧 나의 적이요. 함께 일구어야 할 가치를 위협하는 그릇된 문제해결 방식이 곧 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