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투병(鬪病)했던 1년 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가족들은 모두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복잡한 서류처리와 아빠가 완전히 걸을 수 없게 된 후의 목욕은 주로 오빠가 담당했고 엄마는 일을 관두고 24시간 아빠를 돌보았다. 나와서 살고 있는 나는 고작 일주일에 한두 번이지만 엄마와 오빠가 일주일에 한 번은 각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늦지 않도록 본가로 가 아빠와 함께 공부를 하고 아빠의 굳은 근육과 부은 림프를 마사지를 하고 요리를 했다. 아빠를 잠시도 혼자 두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많은 연락을 주고받았다.
모두들 처음이라 서툴고 조심스러웠다. 아빠도 암환자인 게 처음이었고 우리도 그의 ‘보호자’ 역할이 처음이라 모든 것들이 서툴렀다. 많은 상황이 계속해서 변했고 빨리 적응해야만 했다. 아주 슬프진 않았지만 가끔 슬펐고 견딜 수는 있었지만 가끔 무너졌다. 엄마나 오빠에게 묻진 않았지만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마음의 방향을 무(無)로 정했다. 수술 전날 의사가 말했듯 언제까지 어디까지 투병이 지속될지 몰랐다. 아빠가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고 나에게도 피곤한 지병이 생겼을 때, 마음을 굳게 먹는 대신 굳게 먹은 마음마저 죽이고 모든 감정들을 다 죽이기로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행동이 내 오랜 우울의 증폭제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2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이다. 나는 햇빛과 바람에 참 민감한 사람이다. 기분에 마음을 휘둘리는 일은 별로 없지만 날씨에 기분을 자주 휘둘린다. 식물처럼 햇빛과 바람을 느끼지 못하면 죽어간다. 견딜 수 없는 우울감에게 잠식당해 나를 포기하고 싶어지는 빈도가 더 높아진다. 봄에는 꽃을 보러 다니고 여름에는 바다를 찾았었다. 가을에는 무화과를 먹고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빠가 아프기 시작했던 무렵은 개나리가 싹을 틔울 준비를 할 때였고 아빠가 떠났던 날은 산에 밤송이가 굴러다녔다. 그제야 날씨가 느껴졌다. 아빠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선선했다.
겨울이 왔을 때 아빠는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었고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엄마 혼자서는 더 이상 케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더 이상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즈음 종종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빠의 눈빛이 미워져 팔이 아파왔다. 아빠의 휠체어를 밀면서부터는 언제인지 모를 이별에 대비해서 조심히 안녕히 가라고 항상 손을 흔들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가끔 나를 그런 눈빛으로 볼 때면 이제 곧 정말 떠날 것만 같아서 팔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못한 채로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팔을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해에는 꽃이 피지 않았고 여름도 덥지 않았다. 단풍이 물들지 않았고 겨울도 춥지 않았다. 그랬던 두 번의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한 번 뿐이었던 겨울을 보내고 아빠는 떠났다. 그 시간 동안 항상 알록달록했던 나의 머리색을 아마도 아빠가 물려주었을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오랫동안 바꾸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옷에도 관심이 없어지고 감정도 표정도 지워버렸다. 밝은 낮이 싫어져 자꾸만 어두운 밤으로 숨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온통 까만 밤의 기억들 뿐이다. 나는 울 수가 없었기에 까만 밤과 검은 머리카락이 온통 까맣게 칠해진 나의 슬픔을 대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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