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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턴 치즈만의 작업, 러빙 업

Stilton Cheese Rubbing-up

by 민희 치즈

5일 동안 후프에 담겨 훼이를 몸에서 빼낸 커드는 드디어 치즈라고 부를 법한 형태가 되었다.

그렇게 후프에 담긴 지 엿새째 되는 날, 스틸턴 치즈가 마침내 후프를 벗어던진다. 단단한 원기둥 형태로 굳은 스틸턴 치즈는, 표면을 다듬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를 ‘러빙 업 Rubbing-up’(문질러 닦다)이라고 하는데, 틀을 벗고 나면 바로 숙성실로 향하는 여느 치즈와는 다른, 스틸턴 치즈만의 공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른 아침, 나는 후프가 벗겨지기만을 기다리는 치즈가 가득 쌓인 작업장에 찾아갔다. 그러고는 책임자인 쇼나에게 아주 조심스레 다가갔다.


“쇼나, 오늘과 내일 이 방에서 하는 작업에 제가 참여해도 될까요?”

완고한 성격에 깡마른 쇼 나는 나를 2초간 바라보더니 고맙게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하지만 눈초리가 어찌나 매섭던지,“들어오는 건 허락하지만 작업에 방해되면 바로 쫓겨날 줄 알아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사람들이 챙겨주는 대로 비닐 앞치마와 일회용 라텍스 장갑을 착용하고 얌전히 그들 사이로 들어갔다.

러빙업 작업장의 책임자 쇼나, 치즈 겉면의 거친 부분을 다듬으며 떨어지는작은 치즈 덩어리들을 모아 치즈 윗면에 올려 붙인다. 이렇게 해야 작업중 치즈 무게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아침 여섯 시 반, 러빙 업 작업장의 문이 열렸다. 작업자들은 우선 층층이 쌓여 있는 치즈 중 하나를 꺼내 자기 앞으로 옮기곤 후프부터 빼냈다. 쑥 하고 후프가 벗겨진 치즈는 하얗게 반짝거렸지만 표면은 아주 작은 돌이 전체에 박힌 듯 우둘투둘했다. 소금을 섞어 넣은 커드 조각들의 모양이 그대로 남아 굳었기 때문이었다. 러빙 업은 그저 표면을 예쁘게 다듬는 작업이 아니다. 치즈 표면에 나 있는 수많은 작은 구멍들을 문질러 메꿈으로써 치즈 속으로 공기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작업이다.

사진 오른쪽, 러빙 업 시작 전 거친 커드가 쌓인 치즈의 모습. 사진 왼쪽, 러빙 업이 끝나 하얀 케이크 같은 치즈의 모습

분쇄기에 갈아낸 팝콘 모양의 커드를 소금과 섞으면, 삼투압 현상으로 인해 커드 조각들은 남아 있던 훼이를 빼내면서 점차 단단해진다. 때문에 후프 속에 쌓여 압축되며 크기가 줄어들어도 원래의 팝콘 모양은 그대로 유지돼, 치즈 조직은 흡사 구슬이 불규칙하게 쌓인 것처럼 만들어진다(만약 커드에 소금을 섞지 않았다면 밀가루 반죽처럼 한 덩어리로 뭉쳤을 것이다). 이렇게 작은 구멍이 많아 공기가 쉽게 드나들게 되면 수분이 금방 증발하고 숙성이 너무 빨리 이루어진다. 이를 막기 위한 작업이 바로 러빙 업인 것이다.


작업자들이 납작한 나이프로 문질러 표면을 매끈하게 만드는데, 다들 손놀림이 꼭 생크림 케이크를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다듬듯 부드럽고 가벼웠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치즈를 휙 뒤집어 바닥면까지 꼼꼼히 문질렀다. 거칠었던 치즈 한 덩이가 순식간에 크림을 반듯하게 발라놓은 케이크처럼 바뀌었다.

작업을 지켜본 지 30분이 지났을 때, 마침내 내게도 나이프가 쥐어졌다. 러빙 업 작업을 위한 나이프는 생긴 것도 꼭 생크림을 얹을 때 쓰는 스패튤라처럼 납작하고 넓었다. 첫 번째 치즈가 내 앞에 놓였다. 그러나 지켜봤던 것과 달리 후프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고, 힘으로 흔들어대자 치즈 표면이 부서져 결국 다른 작업자가 빼주었다. 설상가상으로 나이프로 치즈 표면을 문지르려 하면 커드가 우르르 떨어져 나갔다. 아무리 옆 작업자들과 비슷하게 나이프를 사용해도 그들의 치즈처럼 표면이 매끈해지지는 않았다. 빠른 손놀림이 필요한 이 작업은 어깨를 시작으로 팔뚝을 지나 나이프를 지지하는 집게손가락까지 체계적인 힘 조절을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표면을 문지르는 것이 아니라 거의 깎아 밀어내듯 조각을 한 후에야 비로소 그 하얀 케이크 모형을 뒤집을 수 있게 되었는데, 아뿔싸! 그것은 물 먹은 10킬로그램의 돌덩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후들후들 떨리는 내 팔로는 감당이 안 돼서 또다시 옆의 작업자가 뒤집어주어야 했다. 내가 어설프게나마 표면을 제대로 깎아낼 수 있게 된 것은 작업을 시작한 지 5시간이 지나서였다.

러빙업이 완성된 치즈들은 수분이 많은 부분 즉, 푸른 곰팡이가 몰린 부분이 위로 향하게 세운다. 진열대에 올려진 후 숙성실로 이동한다.

스틸턴 치즈 아랫부분에는 아직 덜 빠져나간 훼이가 몰려 있는 반면 윗면은 건조하고 단단했다(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수분은 치즈 하단으로 계속 몰린다). 때문에 건조한 윗부분은 엄청난 힘을 들여야 했지만, 대신 수분이 몰려 있는 아랫면은 약간의 힘으로도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러빙 업 작업을 하고 있는데, 표면에 푸른곰팡이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이 곰팡이는 수분이 몰린 부분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수분은 치즈 아랫면으로 향하게 마련이니, 곰팡이 역시 치즈 아랫면에 먼저 번진다. 요컨대 치즈를 하루에 한 번 뒤집어주는 건 수분을 따라 이동하는 푸른곰팡이가 골고루 퍼지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하얀 치즈 표면을 다듬는 데 집중하던 중 이 단순한 원리를 깨닫자 치즈 숙성의 아주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낸 듯 눈이 번쩍 뜨였다. 러빙 업 나이프는 던져버리고 번개에라도 맞은 듯 불쑥 얻은 깨달음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노트에 마구 적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서 한 마디씩 날아오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부드러운 케이크로 보이는 치즈는 사실 물을 먹은 10킬로그램의 돌덩이 였다.


“민희, 혹시 팔 아파서 메모하는 척하는 거 아냐?”

“아니야! 아니라니까! 난 정말 중요한 걸 적고 있다고!”


강력한 부정의 손사래를 쳤지만 그래, 실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이 작업을 잠시라도 멈추고 싶었다.

러빙 업 나이프를 다루는 미세한 스냅은 어느새 손에 익었고, 첫날 내 작업량은 스무 개나 됐다. 결국 오후가 되자 오른손 집게손가락은 검붉게 부풀어 올랐고 팔은 어깨에서 이탈한 것처럼 따로 흔들렸다. 하얀 케이크인 척하는 돌덩이에 속아도 단단히 속은 러빙 업 작업은 이튿날까지 이어졌다.


**추가 작업

수분이 너무 많은 치즈는 숙성 중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수많은 구멍이 있는 플라스틱 망사를 몸에 감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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