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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턴 치즈의 완성, 7단계의 숙성 과정

Blue Stilton Cheese Ripen

by 민희 치즈

이른 새벽 크롭웰비숍에 가려고 호스텔 출입문을 열었더니, 문 앞 계단에 스페인 친구가 앉아 있었다.

“설마 밤새 여기 있었던 건 아니죠?”

호스텔에서는 보안을 위해 밤에는 출입문을 잠가두기 때문에 늦게 돌아오면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하다 늦었는데 당신이 일찍 나가는 걸 알고 있어서 그냥 기다렸어요.”


노팅엄은 유명 관광지가 아닌 작은 도시여서, 호스텔에는 여행자보다 일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북아일랜드에서 온 사람이 몇 있었고 그보다는 스페인에서 온 이들이 꽤 많았는데, 그들은 보통 2주 이상 혹은 한 달 넘게 머물렀기 때문에 대부분 서로 얼굴을 알고 지냈다. 저녁시간에는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었고 주말 밤엔 다 같이 호스텔 거실 소파에 늘어져 영화를 봤다.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했고 누군가 새로 입실을 하면 호스텔 직원보다 더 빨리 마중을 나가 가방을 받아주었다. 돌이켜보면 노팅엄 기억의 절반은 이글루호스텔의 따뜻함이었다.


한여름이지만 한기가 느껴지는 새벽 5시 반이면 호스텔을 나섰다.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으로 행여 옆 침대 사람들이 깰까 조심조심 짐을 챙기고, 주방에서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 아침을 먹는 건 물론 점심 도시락으로 샌드위치까지 만들었다. 일상은 어느새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정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크롭웰비숍의 작업장에 들어갈 때에도 흰 가운을 사이즈에 맞게 찾아 입고, 머리에 망을 쓰고, 고무장화를 세척 솔에 벅벅 문지른 다음 알코올을 손에 바르는 그 번잡한 소독 과정을 익숙하게 해결했다. 레닛을 부은 우유가 응고되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함께 휴게실에 모여 앉아 BBC 라디오를 들으며 밀크티를 마시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연구실의 헤더, 그녀는 영국식 스콘이 궁금하다는 나를 위해 직접 스콘을 만들고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잼을 챙겨 왔다. 스콘의 레시피는 유명한 브로셔를 참고했다며 보여 주었다.

작업장 안에서와 달리 흰 가운을 벗은 사람들은 집안일이라든가 옆집 때문에 성질이 났다든가 하는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했고 나는 가만히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외국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은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등장인물들이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여유를 만끽하던 장면과 겹쳐 보였다. 이들이 고된 노동 속에 나누는 평범한 대화는 영화에서처럼 애처로우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마냥 이방인 같던 내게도 크롭웰비숍에서의 일상이 점점 익숙해졌다.


“민희, 오늘은 뭐할 거야?”

“숙성실에 온종일 앉아 있을 거야.”

치즈 메이커 야렉은 나보다 한 살 어린 또래여서 금세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새벽에 크리머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그날의 일정을 함께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2007년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폴란드의 임금이 낮아 맞벌이를 해도 생활이 빠듯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좋은 점은 야렉 혼자 일을 하고 아내는 아이들만 돌봐도 생활이 가능한 것인데, 최근에는 대출을 많이 받았지만 집도 장만했단다. 크롭웰비숍의 작업자들 대부분이 폴란드인들이었다. 때문에 작업장 곳곳에는 영어와 폴란드어가 동시에 표기되어 있었다. 영국에서도 힘든 일은 점점 이주노동자들이 맡아가는 듯해 그들에게 조금씩 마음이 쓰였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아니, 무슨 숙성실이 아홉 개나 되는 거야? 그리고 있잖아, 5번 방은 눈이 매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야렉은 내 목에 걸린 투명한 고글의 용도를 그제야 이해하곤 대체 어디서 구한 거냐고 물었다.

“5번 방 구경하러 갔다가 내가 눈을 못 뜨니까 핑키 아저씨가 챙겨줬어. 베트에 우유 거의 채워졌다. 바쁘니까 그만 갈게.”

이제 레닛을 넣어야 하는 바쁘고도 번잡한 시간이기에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운 플라스틱 고글을 써 보였더니 야렉이 웃겨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크롭웰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이들, 맨 왼쪽이 야렉이다. 내가 앉아 노트를 작성하던 곳은 빈탱크로 치즈 메이커들이 그날의 치즈 일지를 작성하거나 잠깐씩 쉬는 장소였다.


크롭웰비숍의 숙성실은 아홉 개다. 숙성실은 ‘방 Room’이라 불렸는데, 1번부터 9번까지 숫자가 붙여져 있다. 치즈는 숙성 정도에 따라 이 아홉 개의 숙성실을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후프에 담긴 커드가 처음 머무는 곳은 3번 방이다. 습도 88%, 온도 23℃의 이 방에서 매일 한 번씩 뒤집으며 몸속의 훼이를 빼내고 닷새째 되는 날 1번 방으로 옮겨 17℃의 조금 낮은 온도에서 몸을 차갑게 굳힌다(사실 3번 방과 1번 방은 숙성실이라기보다는 보관실이다).

치즈는 이 방에서 후프의 48개 구멍을 통해 몸속의 훼이를 빼내기 때문에 숙성실 이라기 보단 보관실이다.

엿새째에는 후프를 벗고 러빙 업 작업을 끝낸 후에는 2번 방이나 4번 방으로 옮겨져 열흘간 머문다. 습도는 90%, 온도는 20℃를 유지하는 이 방들은 아직 아기 같은 치즈로 인해 달달한 우유 향으로 가득했다. 수분이 많아 조직은 질척했지만, 푸른곰팡이가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는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 치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러빙업을 끝낸 치즈는 푸른곰팡이가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는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어지는 7번 방으로 옮기는 날은 만든 지 16일째인데, 습도 90%에 온도는 18℃다(2, 4번 방에 비해 온도만 2℃ 낮다). 앞의 숙성실과 마찬가지로 열흘간 머무는 이 방에서 치즈는 흰 외피가 건조되면서 노란빛을 띠는 껍질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노란 껍질 위로 옅고 하얀 곰팡이가 덮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발효 속도가 느려서 그런지 은은한 우유 향에 평화로운 공기가 맴돌았다. 그 전 과정에서 수분을 거의 빼고 와서 그런지 치즈는 상큼하게 촉촉한 상태였다.

노란 껍질 위로 옅고 하얀 곰팡이가 덮이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은은한 우유 향이 남아있는 촉촉한 상태였다.
치즈가 숙성되기까지 치즈 메이커들의 수고는 끝이 없이 들어간다. 매일 치즈를 뒤집는 작업을 해야 치즈의 수분이 골고루 퍼지며 숙성이 잘 이루어진다.

7번 방에서 열흘을 보낸 치즈는 이제 5번 방으로 옮겨 가 다시 일주일을 머문다. 아홉 개 숙성실 중 가장 맹렬하게 눈이 매운 곳, 나는 이곳에서 고글을 쓰고 다녀 다른 작업자들을 웃기곤 했는데, 그건 매운 암모니아 가스 때문이었다. 습도 82%에 온도는 16℃( 7번 방에 비해 습도는 8퍼센트가 낮고 온도는 2℃낮다.)를 유지하는 이 방에서 치즈들은 발효의 최고점에 달한 듯 강한 암모니아 가스를 뿜어댔다. 암모니아뿐만이 아니었다. 치즈는 마치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발효되고 있는지 보여주려는 듯 온몸에 곰팡이를 두껍게 피워냈다. 곳곳에 영역을 확보하듯 치즈 위에 곰팡이가 그려내는 선도 명확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폭신폭신한 목화솜처럼 피어오른 곰팡이는 치즈를 감싸듯 덮어 발효 기간 중 최고의 모습이었고 그건 (치즈에게 사용하기 힘든) ‘자태’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모습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옅은 노란색 껍질이 분홍색을 띠면서 치즈의 안과 겉을 명확히 구분해 이때부터는 치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폭신폭신한 목화솜처럼 피어오른 곰팡이는 치즈를 감싸듯 덮어 발효 기간 중 최고의 모습이었다.
접사로 찍은 곰팡이의 모습, 포근하게 피어오른 솜의 모습과 비슷했다. 숙성이 진행 될 수록 솜같은 곰팡이는 치즈 전체를 뒤덮었다.

이제 치즈는 6번 방으로 옮겨져 일주일간 머문다. 이때부터는 아주 못생겨지기 시작한다. 여전히 곰팡이에 온몸이 둘러싸여 있긴 하지만 5번 방에서처럼 예쁜 분홍빛에 화사한 목화솜 같던 곰팡이는 온데간데없이 아주 칙칙한 갈색으로 돌변했다. 어린아이에서 아름다운 청년을 지나 원숙한 어른으로 되어가는 것이었다. 6번 방은 5번 방과 비슷한 환경이다. 온도는 16℃로 같고, 습도가 2% 낮은 80%다. 이런 정도의 차이로 치즈에 무슨 변화가 있을까 싶은데, 이 6번 방에서 치즈 온몸에 아주 많은 구멍을 내는 ‘피어싱 Piercing’ 작업을 한다. 발효가 거의 멈춘 시점에 물리적인 변화를 주는 것이다.


**치즈의 숙성실 이동 경로는 총 7단계로 3번-1번-2 or 4번-7번-5번-6번-출고실의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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