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다 쓰지 못한 채로 한국에 돌아왔다. 몸이 좋지 않았고 남편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주제에 대해서는 지도교수와 충분히 얘기를 나눴으니 한국에서 논문만 마저 쓰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 징후를 보였던 엄마는 치매 판정을 받았다. 부모님 둘만 살던 집은 이내 난장판이 되었다. 엄마의 이상 행동은 나날이 더해만 갔고 아버지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으며 급기야는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일까지 반복되었다. 이렇게 되는 동안 내가 손 놓고 있었을 리는 없다. 멀리 떨어져 사는 두 언니 대신 그나마 가까웠던 내가 모든 것을 떠맡았다. 연락을 받고 응급실에 달려가는 일, 병원에 보호자로 같이 다니는 일, 치매에 좋다는 영양제나 놀이도구 등을 준비하는 일, 매일같이 전화를 하고 엄마의 증상과 아버지의 하소연을 받아주는 일, 종종 집으로 찾아가는 일 등. 여하튼 두 사람의 캐어에 관련되는 일은 모두 내 차지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을 이래저래 돌보는 일 역시 나의 것이었다. 논문작업은 하염없이 뒤로 밀려만 갔다. 내 삶도 뒤로 밀려가고 있었다.
할 사람이 나 밖에 없으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었을까. 나는 이내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심리상담까지 받았다. 그 와중에 깨달은 사실은 내 삶을 통째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그 모든 일을 묵묵히 해냈다는 사실.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게 그 모든 난리통의 진실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일찍부터 포기를 했던 엄마의 사랑 대신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한 아이였다. 하지만 충족되지 못했던, 아니 충족될 수 없었던 욕망은 몸이 크고 머리가 자라서도 마음속 어린아이의 내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버지가 바라는 건 내가 부모님을 돌보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요구에 부응하려 노력했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찾아서 했다. 하지만 언제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부모님을 직접 모시고 살지 않는 이상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욕망과 아버지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사랑을 받고 싶어서 아버지의 욕망을 읽고 충족시켜주려 했던 어린아이는 그 일이 어차피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결국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잘 알고 있었다.
그 깨달음이 상황을 당장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주변 사람들에게 맞춰주는 사람이었고 그 이외의 방법을 습득하지 못한 채였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그 모든 격언과 충고는 아직 쓸모를 찾지 못한 채 죄책감만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당시의 모든 상황은 남편까지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었다. 교수가 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는 남편을 돌보는 대신 친정에 모든 신경을 쏟아붓는 아내. 그게 남편이 보는 나의 모습이었다. 나 나름대로는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있었지만 불만은 수시로 표출되었고 싸움과 갈등은 그칠 줄 몰랐다. 결국 남편이 다른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우리는 별거에 들어갔고 몇 년 뒤엔 이혼을 했다. 20년 동안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부모님 곁에 묶인 채였지만 균열은 시작되고 있었다. 파혼도 이혼도 모두 나를 위해서가 아닌 이유로 미루곤 했던 내가 결국 이혼을 실행했다는 건 커다란 경험이자 무언가의 끝이며 새로운 시작이었다.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 내가 모두를 돌보다가 이제 나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낯선 일을 시작한 건 50살이 다 되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