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하린

평판등의 한 귀퉁이가 천장에서 떨어져 나와 있었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의 거실로서는 특히나 위험한 상태였다. 빠져나온 피스만 조인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등을 아예 탈거하고 앵커를 새로 박아야 했다. 나는 드릴을 들고 사다리 위에 올랐다. 길이가 640mm 인 정방형의 등 중앙을 천장을 향해 밀면서 박혀있는 나머지 피스들을 조심스럽게 돌려 빼냈다. 3kg 정도 되는 등은 오롯이 내 왼쪽 손바닥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 탈거 후 석고 천장에 앵커를 새로 박아 넣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한 손으로는 등을 받치고 한 손으로만 전선을 커넥터에 꽂아야 했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첫 단계는 성공. 두 번째로는 무겁고 부피가 큰 등을 한 손으로만 버티면서 피스를 천천히 돌려야 했다. 등의 프레임에 가려진 앵커의 구멍을 찾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은 내 몸에서만 천천히 흘렀다. 힘이 점점 빠져나갈수록 더 힘을 내야 하는 극한의 아이러니를 견뎌야 했다. 울고 싶은 심정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경쟁하듯 머릿속을 오갔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피스를 꽉 조이는 순간이 왔다. 등에서 손을 떼었다. 잘 붙어 있다. 살짝 흔들어 본다. 괜찮다.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방에 들어가 있던 고객은 어느새 나와 있었다. 아유 고생 많으셨어요. 땀범벅이 된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건넨 한마디에 힘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오늘도 잘 해냈다. 계좌에 4만 원이 입금되었고 나는 이틀 동안 밥도 먹고 물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돈 걱정 없이 속 편한 삶을 살았던 건 대학을 졸업하던 시점 까지였던 것 같다. 집안은 소위 중산층이었고 아르바이트 두어 달 정도 해본 것이 내 경제활동의 전부였다.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해서 독일로 유학을 떠났을 때도 부모님으로부터 생활비 지원을 받았다. 그때부터는 빚을 지고 있다는 죄책감에 속이 편치는 않았다. 그렇게 십여 년을 보냈다. 친구들이 경제활동을 하며 세상을 배워가고 있던 동안 나는 책을 읽고 사유를 글로 담아내며 세상 물정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그럴수록 죄책감도 층층이 쌓여갔다. 되돌아보면 그 무렵부터 뿌리 깊은 콤플렉스가 시작됐다.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가치 없는 사람. 나이와 더불어 초조함이 쌓여갔다.


박사학위를 다 마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남은 부분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때 논문보다 순위에서 앞서는 일이 생겼다. 부모님의 보호자 노릇이었다. 새벽에 응급실로 달려가고 병원에 동행하고 정서적으로 지지하며 무엇이 됐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일. 또래들이 50대에 경험하는 일이 10년 앞서 다가온 이유는 내 부모님의 나이가 그들의 부모님보다 10살이 많았기 때문이다. 언니들이 있었지만 사정상 내가 도맡을 수밖에 없었다. 내 생활의 중심에는 부모님과 다른 가족들이 있었고 그런 환경에서 논문을 완성하기까지 8년을 더 보내야 했다.


초조함은 내 정서의 기본값이 되었다. 학위는 목표라기보다는 오기였다. 이미 막내 교수들은 내 나이보다 아래였다. 그래도 그대로 놓을 수는 없었다. 그게 유일한 이유였다. 그렇게 내 젊은 날을 온통 채웠던 일은 흙속으로 스며드는 빗물처럼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나이뿐이었다. 40대 중반. 뭘 시작할 수 있을까. 허깨비 같은 박사학위만 손에 달랑 쥔 채로.


시작은 번역이었다. 글 쓰는 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고, 독일어 번역계는 영어보다 인구밀집도가 높지 않았다. 적성으로나 접근성으로나 가장 용이한 길이었다. 나는 편집자가 놀랄 만큼 빠르게 일을 마치곤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번역은 나에게 뿌듯함을 주었지만 생활을 허락하진 않았다. 200쪽짜리 책 한 권을 번역하고 버는 돈은 200만 원 정도. 걸리는 시간은 두어 달. 일이 쉬지 않고 들어온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남편이 준 카드를 쓰고 있었지만 이미 별거에 들어간 상태에서의 경제적 동거는 수치스러웠다.


이내 이혼을 하고 꽤 큰 금액을 통장에 넣어놓게 된 이후에는 조금 숨이 트였다. 그럼에도 스스로 벌지 못한다는 자괴감은 누적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뭘 해서 돈을 벌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어딘가에 취직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뻔한 사실은 기본 전제였다. 그러니 스스로 판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움직일 수 없는 나의 조건일 밖에. 그것을 자영업이라 부르든 사업이라 부르든 간에 나에게는 낯선 땅에 가서 지내는 일 보다 훨씬 더 이질적인 삶의 형태였다. 그때 이질적이지 않은 일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사진작가였다. 그중에도 바디프로필을 찍는. 당시 피트니스 업계는 블루오션이었다. 특히 대회 사진이나 바디프로필 사진을 찍는 일은 더욱 그랬다. 나는 10년 넘게 취미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모델을 구할 수 없었던 여건상 인물 촬영에 매우 목이 말라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단가가 높았다. 잘만 하면 돈을 쉽게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회 사진부터 찍어서 무료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반응은 좋았다. SNS에서 인지도도 쌓였다. 고객층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허름하고 싼 공간에 스튜디오를 열었다. 하지만 고객은 찾아오지 않았다. 1년 뒤 스튜디오를 유동인구가 더 많은 쪽으로 옮겼다. 무료 촬영은 물론이고 스스로 몸을 만들어 셀프 촬영까지 하며 포트폴리오를 적립했다. 그래도 결과는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다음엔 스튜디오를 역세권으로 옮기고 인테리어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 촬영 퀄리티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의문을 가진 채 답보 상태를 유지하던 내 머릿속에는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시 열정을 갖고 있던 클라이밍이라는 스포츠용 의류를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시장은 좁았지만 종류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해볼 만한 것 같았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의류 제작 근처에 가본 적도 없지만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동대문을 돌아다니며 감을 잡아갔다. 그리고 몇 달 뒤 런칭을 했다. 반응은 좋았다. 마진을 적게 잡고 기존 의류와 다른 스타일을 추구한 것이 호응을 얻은 듯했다. 클라이밍 의류를 모아서 페어에 참가한 부스에서는 판매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시작은 그렇게 순탄해 보였다. 하지만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자금 문제가 찾아왔다.


매출은 나오는데 통장은 비어갔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좀 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다음 달도 그다음 달도 결과는 같았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팔고 있었지만 벌지는 않았다. 나는 일하고 있었지만 운영하고 있지는 않았다. 열심히 하면 해결될 거라 믿는 습관은 학문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공부는 노력의 양이 결과로 환산되는 세계였다. 하지만 사업은 아니었다. 사진도 그랬다. 결과물이 좋으면 따라올 것이라 믿었다. 의류도 마찬가지였다. 물건이 좋으면 팔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돈은 감각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재고와 고정비와 보이지 않는 비용들이 먼저였다. 나는 계속 일을 하고 있었고 구조는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사업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노동자처럼 사고하고 있었다.


대출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에서야 비로소 돈은 숫자로 다가왔다. 매출은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옷을 샀고 촬영 예약도 잡혔다. 그런데 나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나는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돈의 흐름을 잠시 통과시키는 통로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나는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바닥 없는 추락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조용히 떼어냈다. 모두가 같은 바닥 위에 서 있다고 믿었던 시간이 그때 끝났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좌표를 잃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세상에서 유리된 상태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물리적인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전기라는 세계로. 인테리어가 돈이 된다는 말을 믿었다. 그중 내 손에 잡히는 것은 전기가 유일했다. 그래서 전기부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나는 철물점을 들락거리며 각종 기계를 만드는 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세 딸 중 늦둥이 막내로서 아들 노릇을 하다 보니 집에서 전구를 갈거나 고장 난 기계를 고치는 일도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LED 가 보편화된 뒤부터는 집에 있는 등기구를 직접 교체하곤 했다. 단기로 편성된 집수리 학원을 다니고 바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벌이는 생각보다 더 초라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은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전기를 다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