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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망

작지만 확실한 목표, 가족이 함께 이루다.

by Lydia young

누구에겐 너무나 평범한,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사는 일이 소원이었던 우리 가족이 10여 년 만에 모여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예전처럼 한 집에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날이 꼭 돌아오길 바라며 늘 기도했는데 그 작은 소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딸들이 아프거나 지치고 힘들 때 바로 옆에서 토닥여 주지 못한 아쉬웠던 시간들이 흐르고 흘러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기까지 가족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별 탈 없이 보낸 딸들은 보통의 대학 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보통 대학에 들어가면 생각하게 되는 로망들은 접어 두고 넉넉지 못한 현실에도 잘 적응하며 견뎌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혼자 원룸에서 살며 대학 생활을 보낸 큰 딸,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지낸 작은 딸. 모두 힘든 대학 시절을 보내고 딸 둘은 직장생활을 하며 둘이 함께 지냈습니다.


남편의 파산과 함께 남편의 사업에 아파트 담보 대출과 보증을 섰던 나도 파산이 되어 우리 부부는 지방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결혼하고 20년 동안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을 잃고 막막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딸들을 생각해 힘을 냈습니다.

택배를 하며 시골의 지리를 익힌 남편과 나는 조그만 가게가 달린 집을 구했습니다.


그곳에서 장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택배를 그만두고 낮에는 시골 작은 병원 관리직 일을 하며 밤에는 나와 함께 호프집을 했습니다.

식당을 하기엔 경험이 없어 저녁 장사만 하는 호프집이 덜 부담스러워 시작했습니다.


술도 못 마시고 평상시 호프집을 잘 다녀 보지도 않았던 내가 호프집을 어떻게 할까 걱정이 앞섰지만 남편과 함께 하니 용기를 내 시작했습니다.


연고가 있는 지역도 아니고 아는 사람 없는 시골에서 우리 부부는 둘이 서로 의지하며 잘 버텨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겁 없이 시작한 장사지만 쉬는 날 없이 성실하게 한 덕분에 작은 동네의 사랑방 같은 인기 있는 호프집이었습니다. 작은 사건 사고들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1997년, 우리나라에 IMF위기가 오면서 직장은 나이 들어 퇴직할 수 있는 정년 개념이 없어지며 실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위기감에 나는 한식, 양식조리사 자격증을 따 놓았었습니다.


호프집 개업에 자격증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 "자격증 있는 요리사로 음식을 한번 만들어보자!" 하며 자부심을 갖고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내 마음가짐이 그래서인지 손님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고 맛있어했습니다.


나는 요리를, 남편은 서빙과 손님관리를 했습니다.

8년간 운영한 호프집. 개업날 엔 손님이 없어 문 밖만 내다보고 있었는데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엔 오픈시간 전부터 문 앞에 와 있으니 문 열어달라는 전화, 단체팀이 미리 예약하려는 전화 등 8년이 지난 후엔 단골도 꽤 생기고 음식이 맛있다고 해 주는 손님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딸들이 우리가 있는 시골로 와서 함께 보내고 돌아가면 아쉬운 마음에 고개 넘어 터미널로 향하는 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딸들의 너무 예쁜 대학시절, 딸들의 청춘을 함께 보내주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작은 딸은 "엄마랑 쇼핑 다니는 딸들 모습을 보면 너무 부러워!"라는 말로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딸들과 함께 네 명이 모여 함께 살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8년이 지나고 딸들도 사회생활을 하며 어느새 결혼할 나이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딸들이 결혼하기 전에 함께 살아보고 싶어 졌습니다.


남편에게 딸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잘 되고 있는 장사를 접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하는 고민이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운영하던 호프집을 정리하고 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작은 집을 구해 함께 살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밤에 장사를 하고 새벽에 먼 길을 달려 아이들 있는 곳으로 가서 딸들의 원룸에서 쪽잠을 자며 집을 알아보았습니다.

딸들도 시간이 되는 날엔 함께 집을 보러 다녔습니다.

우리 넷은 담당 분야를 정하고 집을 보러 다녔습니다.

우리 부부는 집 상태 점검, 큰 딸은 메모, 작은 딸은 양해를 구하고 사진 촬영.

정말 환상의 멤버였습니다.

낮에는 집을 보고 다시 가게문을 열기 위해 돌아가 밤에 장사하기를 두 달여.

드디어 우리의 집을 구했습니다.


도배를 새로 하고 집 청소를 하며 우리 가족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드디어 우리 가족이 모여 살게 되는구나!" 이런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드디어 이사하는 날, 원룸의 딸들 살림과 우리 부부의 이삿짐 모두가 우리의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 매일, 같이 자고, 밥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는 일상적인 일들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만났다가 헤어질 때마다 아쉬워하던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나도 일자리를 구하고 네 명이 함께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 퇴근길에 만나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이 기뻤습니다.

장사하는 동안 새벽까지 장사를 해야 했고 쉬는 날 없이 장사를 하다 보니 주말이 있는 삶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지만 각자의 자리를 잘 지키고 참아낸 가족들이 고마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평범한, 가족이 한집에 모여 사는 작은 소망을 마침내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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