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아파트를 구하는 방법 - 전봇대를 유심히 살펴보자!
전세 만기 석 달 전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계약 기간이 지나면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니 새로 이사할 집을 찾아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긴, 전셋집에서 천년만년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무슨 배짱으로 계획도 없이 살았을까. 진즉에 다음 살 집을 알아보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됐다.
우리는 날이 밝자마자 읍내 부동산부터 찾아갔다. 다행히 남편은 직장을 옮겨 이전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졌고 나는 아이 어린이집을 핑계로 읍내를 들락거리며 주변 지리를 익혀뒀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생활하기 지쳤기 때문에 이번에는 외딴집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읍내 쪽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읍내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저렴한 가격의 신축 건물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읍내 안에서는 선택의 범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시골이라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읍내 대단지 아파트는 주변의 소도시와 별반 차이가 없는 가격이었다. 우리가 돌아다닌 부동산엔 매물이 적었고 전셋집을 찾기가 힘들었다. 주말마다 인근 도시인 목포까지 건너가 열심히 집을 알아보았다. 영암뿐만이 아니라 삼호읍과 목포 구도심, 남악 신도시까지 한 달 이상 집을 찾아 헤맸지만 어느 곳에도 우리 세 가족이 살만한 마땅한 (가격의) 집이 없었다. 그제야 우리는 첫 집을 쉽게 구했던 것이 보기 드문 행운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사할 집을 찾는 일에 지쳐갈 무렵, 남편과 읍내 사거리를 걷다가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발견했다. ‘아파트 매매’라고 쓰인 종이는 얼마나 오랫동안 붙어있었는지 누렇고 쭈글쭈글했다. 평소였다면 전봇대 전단지는 무시했을 테지만 집을 구해야 하는 절박함 때문인지 그날따라 유독 눈에 띄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아님 말지 뭐’라는 심정으로 전단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집주인은 대뜸 지금 집이 비어있으니 직접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네비를 찍고 집주인이 말한 주소로 찾아갔다. 주소는 읍내 도서관과 가까웠고 군청이나 마트에서도 멀지 않았다. 주인은 대면도 없이 통화로 아파트 비밀번호를 불러주며 "알아서 집에 들어가 구경하라" 말하고 쿨하게 전화를 끊었다. 시크한 태도에 당황한 것도 잠시,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꼼꼼하게 집을 살펴보았다.
지은 지 13년이 지난 24평짜리 아파트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연식에 비해 관리가 잘되어 단지가 깔끔했다. 1층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남편은 '아직 아이가 어리니 층간소음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읍내권 안에 있으면서도 중심가에서 떨어져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마침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과도 가까웠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진 예산(6천만 원)으로 살 수 있는 최선의 집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그 집을 보고 며칠 후 바로 집주인과 계약을 진행했다.
놀랍게도 영암에서는 한 번도 부동산을 거쳐 집을 구하지 않았다. (아니, 구하지 못했다) 당연히 좋은 집을 구하려면 여기저기 발품을 많이 파는 게 중요하다. 정착 초기와 다르게 현재는 부동산중개업소의 수가 많아졌고 유튜브와 블로그를 이용해 집을 홍보하는 최신식 중개업자도 생겼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첫 번째 집은 사이트에 사진을 올려놓은 집주인과 직접 연락해서 얻었고, 두 번째 집은 우연히 지나가다 발견한 전봇대 전단지를 보고 집을 구했다. (두 번째 계약은 전세가 아닌 매매였기 때문에 직접 법무사를 찾아가 진행했다.) 시골은 아직까지도 부동산보다는 ‘누구누구네 집 내놨다더라’는 입소문과 전봇대 광고가 먹히는 아날로그 방식이 대세였다. (우리만 그랬는지도.)
드디어 이사를 두 달 남겨두고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장판과 벽지는 물론이고 중문 설치나 주방의 부분 리모델링, 화장실 개조까지 모두 업자 도움 없이 둘이서 셀프로 진행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비용을 최대한 절약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중문과 화장실의 변기, 세면대, 부엌에 들어갈 자재, 나무, 부속품, 필름지, 페인트, 각 방의 조명, 게다가 거실 장판과 벽지까지 비용을 모두 합해도 오백만 원이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거의 도배 전문가가 되었다) 일단 이사를 하기로 결정하자 리모델링은 일사천리로 바쁘게 이루어졌다. 목공 작업은 남편이 담당하고 칠과 필름 작업은 내가 진행하는 철저한 분업화였다. 그나마 목공 기계를 다룰 줄 아는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이 너무 힘들어 이삿날에 "혹시 또 이사를 하게 된다면 돈을 좀 쓰더라도 이제 다시는 셀프 리모델링은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남편은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무서운 말을 남겼다.
이사를 준비하며 정들었던 한옥집을 떠날 생각을 하니 어쩐지 마음이 쓸쓸했다. 이제 넓은 마당도, 해질 무렵의 노을도 마지막이구나, 섭섭함이 밀려왔다. 우리는 한옥마을에서 살았던 삼 년 동안 충분히 전원을 만끽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깨끗한 공기, 텃밭 가꾸기, 넓은 마당에서 아이를 키우는 잔잔한 시골 라이프, 이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목표로 하는 삶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 없는 외딴 시골에서 농사를 업으로 삼지 않은 젊은이들이 살기에는 외롭고 막막했던 게 사실이었다. 팅커벨만큼 커다란 벌레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적응되었지만, 겨울의 취약한 난방시설이나 지면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해가 바뀌어도 적응할 수 없었다. 또 마트나 학교와 같은 실생활과 직결된 인프라의 부족, 사회와 단절된 고립감 등은 개인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나는 외로웠다. 사람들 속에서 어울려 살고 싶었고, 가까운 친구들과 아무 때고 만나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는 시간이 그리웠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 미련을 털어버리고 학교와 도서관이 인접한 읍내로 터전을 옮겼다.
이사를 하는 동안 과연 시골 아파트로 집을 사서 들어가는 게 옳은 결정인가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골까지 와서 전원주택도 아니고 아파트라니. 게다가 원래는 매매가 아니라 전셋집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계획에 없던 집을 사는 것이 갑작스럽기도 했다. 솔직히 생활의 편의 이외에도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게 저렴한 시골 아파트 가격도 빠른 결정의 이유였다. '나중에 안 팔리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지방 외곽의 매매가는 그런 걱정을 뒤로할 만큼 부담이 없다. (시골도 주택보다는 아파트를 선호하기 때문에 더 빨리 팔리기도 한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이렇게 가벼운 주머니로 집을 장만할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추위나 벌레, 습기에서 벗어나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아이를 기르게 되어 육신의 편안함을 느꼈다. 시골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아이는 가까운 병설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진학했다. 외딴 동네에서 또래 없이 혼자 놀던 아이는 이사 후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수시로 놀이터를 드나들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렸다. 나 역시 활동 반경이 넓어져서 더 다양한 경험을 접하고 많은 사람을 사귈 수 있게 되었다. 비슷한 연배의 이웃과 어울리며 정을 쌓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섭섭함이 남았던 시골길 산책은 길만 건너면 보이는 숲 산책으로 바뀌었다. 알고 보니 지척에 국립공원 등산로와 숲 산책로가 있어서 오히려 전보다 자연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내가 시골 아파트 생활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남편은 기뻐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기회가 된다면 자신이 직접 지은 한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하긴, 시골에서 살며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을 직접 느끼지 못하는 아쉬움이 왜 없겠는가. 나는 그럴 때마다 제발 나는 데려가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지만, 어느새 나무 냄새 가득한 한옥집과 철마다 부지런히 바뀌는 풍경을 상상하며 행복한 노후의 계획을 세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