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 Jul 15. 2021

시골에서 아이를 기르는 삶


  아이에게 시골 동네는 가장 즐거운 놀이터였다. 매일 아침 마당에 나가 고양이를 쫓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엄마가 빨래를 너는 동안 집 주변 곳곳을 탐험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뛰지 말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기에 늘 활달하고 씩씩하게 안팎을 뛰어다녔다. 일과처럼 이웃집 닭장을 구경하고 동네 강아지들에게 다가가 인사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동네에서 유일한 어린애였기 때문에 이웃들은 아이가 오면 반갑게 맞아주었다. 덕분에 아이는 낯을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덥석 덥석 안겨서 “이러다 나중에 낯선 사람이 와도 경계심 없이 쫓아가는 거 아니냐”라고 걱정을 듣기도 했다.


  나는 그즈음 동네 어르신들의 보이지 않는 보살핌과 배려로 마을에 완전히 적응했다. 옆집 아주머니와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꽤 가까워졌고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를 나누기도 했다. 50대 후반이었던 중년 부부는 자녀들이 모두 둥지를 떠나 새로운 터전으로 이사를 와서 집을 가꾸는 재미로 사는 분들이셨다. 마을 사람들은 도시 생활에 더 익숙한 분들이라 함부로 타인의 경계에 침범하지 않았다. 바로 옆 터주 마을을 산책하다 보면 '누구네 집 며느리 아니냐'는 정겨운 오해로 허물없는 대화가 오갔다. 대체로는 웃는 얼굴로 대꾸를 했지만 잘 모르는 이의 속사정까지 깊이 알고 싶어 하는 노골적인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반면 한옥마을 사람들은 독립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분위기였고 볼 일이 있어도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남편이 기대했던 시골 정서는 아니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쪽이 편했다. 적당한 무관심과 사려 깊은 배려는 오랫동안 한 마을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한 폭의 그림 같았던 옆집은 봄이면 과실수와 꽃밭이 만발했고 안쪽 마당의 잔디는 잡초 하나 없이 깔끔했다. 그 집은 모두가 인정하는 전원생활의 정석에 가까운 아름다운 집이었다. 하필이면 마을 길목에 자리해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옆집을 보고 감탄했다. 아주머니는 늘 새벽에 일어나셔서 오전 내내 정원을 가꾸고 계절마다 새로운 꽃을 들여 집구석구석을 화려하게 수놓는 부지런한 분이셨다. 나중에 아이가 크고 여유를 갖게 되면 나도 아주머니처럼 살 수 있을까? 우후죽순으로 풀이 자라서 지저분한 우리 집 마당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옆집이 전원의 로망이라면 우리 집은 마치 전원의 좌절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시 같았다. 나는 아주머니의 바지런함에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하루는 아기띠를 매고 옆집 앞을 지나는데 아주머니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힘들지? 난 그맘때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갔던 거 같아. 화장실 문 앞에서 문 열라고 엉엉 우는 연년생 애들 때문에 힘들어서 화장실 안에서 나도 같이 울었어. 그땐 애들한테, 아이고 나 늙어도 좋으니 어서어서 자라라, 빨리빨리 커라, 그랬다니까.” 솔직하면서도 다정한 아주머니의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현실판 타샤 튜더처럼 보이는 분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잔잔한 위로가 되었다.


  아이는 매일 시골 동네를 거닐며 건강하게 자랐지만, 영암에 오자마자 아이를 낳고 육아를 시작한 나는 단조로운 시골 생활이 갑갑했다. 시댁이나 친정의 지원군도 없이 오로지 혼자 힘으로 아이를 돌보려니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적어도 다섯 살까지는 집에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조언과 “엄마도 힘들고 애도 힘든데 왜 아직까지 집에만 있냐”는 지인들의 간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동안에 아이가 세 살이 되었다. 외딴 시골에서 하루 종일 아이하고만 지내는 일이 점점 힘에 부쳤다. 보다 못한 남편은 잠깐씩이라도 아이를 케어해주는 시간제 시터를 알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빠듯한 외벌이 형편에 그것도 전업주부가 사치스럽게 시터라니, 더군다나 도시도 아닌 촌에서! 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거리를 지나다가  언뜻 아이 돌봄 서비스가 있다는 현수막을 보았다. ‘아이 돌봄’이라는 문구만 보고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면사무소에 찾아갔다. 아이돌보미 지원 신청은 어떻게 하면 되냐는 나의 질문에 면사무소 직원은 “다문화 가정이신가요?”라고 물었다. 이쪽 지역은 다문화가정이 흔했고 돌봄 신청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하며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직원은 대수롭지 않게 “그럼 맞벌이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으시면 신청 못해요. 차라리 어린이집을 보내세요. 세 살이면 충분히 어린이집에 갈 수 있는 나이예요.” 40대 언저리로 보였던 여자 직원은 육아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나의 몰골을 보고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나는 어쩐지 부끄러운 감정이 들어 얼굴이 붉어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이 되어 퇴근한 남편에게 면사무소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남편은 혼자 골몰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주겠다고 선언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면 아무래도 운전을 배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오래전에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긴 했지만  면허를 딴 후에는 운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사이 운전에 대한 공포증이 생겨 이른바 장롱면허가 돼버렸다. 영암에 들어와서야 시골 생활은 운전이 필수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지만 도무지 운전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드디어 때가 왔다! 이제 운전은 아이와 나의 사활이 달린 문제였다.      


  집 근처에는 어린이집이 전무했고 한참 떨어진 읍내 쪽으로 나가야만 어린이집이 있었다. 읍내에 있는 영유아 전문 어린이집에 물어보니 거리가 먼 곳까지는 등 하원 차량이 어렵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으리라 결심을 하고 주말마다 남편에게 운전을 배웠다. 보통은 부부 사이에 운전을 가르치면 크게 싸움이 난다고 하던데, 어쩐 일인지 우리는 수월하게 연수를 마쳤다. 남편 직업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강사인 탓도 있었겠지만, 차량 통행도 적어 운전 연습을 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던 시골길이 한몫했다. 주로 인적이 드문 대로에서 주행하며 천천히 운전 감각을 익혔다. 다행히 읍내까지 운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초보운전 딱지를 붙이고 위풍당당하게 중고차를 몰았다. 아이는 내가 운전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어린이집을 다닐 수 있게 됐다.


  아마 시골에서 애를 키우지 않았더라면 운전 공포증이었던 내가 차를 몰고 다닐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도시였다면 흙먼지 가득한 마당이 아니라 청결한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냈겠지. 어쩌면 집 가까이에 있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좀 더 빨리 보내고 나 자신을 돌볼 에너지를 확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그 가정들이 종일 아이와 흙바닥에서 뒹굴다가 해 질 무렵 시골길을 산책하던 지난날에 비할 바는 아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어떤 환경에서건 스스로 헤쳐나가는 용기를 얻었고 자식이기에 앞서 힘든 시절을 함께 통과한 전우가 되었다. 아등바등하며 어떻게든 살아보자 애쓰던 그 숱한 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만큼 내 아이를 절실하게 사랑했을까. 시골에서의 육아는 나를 단련시킨 담금질인 동시에 무한한 축복이었다.     



이전 05화 해가 지는 풍경을 보는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