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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스쳐가기 24화

사용설명서

ON 버튼부터 누른 우리

by 김챗지


박스를 열면

얇은 종이 한 장,

사용설명서가 들어 있다

주의사항은 굵은 글씨로,

경고는 붉은 잉크로 찍혀 있지만

우리는 읽지 않는다

쉬워 보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 자신감으로

버튼부터 누르고

전원을 켠다


오작동은 언제나

그 다음에 온다


이미 긁힌 표면을 쓰다듬으며

비로소 종이를 펼친다


사람도 그렇다


관계는 조립을 요구하고

마음에는 숨어 있는 주의문이 있지만


우리는 설명 없이

작동하길 바라며 시작한다


한 줄쯤 읽었더라면

그 사람의 취약한 구석,

그리움으로 켜지는 전원을

미리 알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다 어긋난 순간에야

우리는 매뉴얼을 찾는다


어쩌면 처음부터

설명서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설명 없이

그저 사랑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설명서를 끝까지 읽지 않습니다.

물건을 처음 접할 때조차

‘일단 켜보고 보자'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그 작은 자신감 뒤엔 익숙한 태도도 숨어 있습니다.

‘별일 없겠지’, ‘그렇게 복잡하진 않겠지’ —

익숙함은 때로 섣부른 믿음을 낳지요.


그런 태도는 관계에서도 반복됩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어떤 버튼에 취약한지 충분히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좋아하니까", "서로 잘 지내보자"는 마음으로 곧장 다가섭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오작동을 만나게 됩니다.

상처받은 표정을 보고서야 문득,

그 사람 안에 숨어 있던 주의문 한 줄이 떠오릅니다.

'아, 이런 건 조심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때쯤이면 이미 조금 긁힌 마음이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뒤늦게 펼쳐본 매뉴얼은 미안함과 아쉬움의 종이처럼 느껴지지요.


그래서 생각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저 감정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고유의 사용법을 읽어내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마음에는

빈칸으로 남겨진 사용설명서가 있습니다.

그 빈칸은

살아가며 서로 채워가야 하는 부분이겠지요."


하지만 최소한,
그 사람의 취약한 구석과 켜짐의 방식에 대해,
한 줄쯤은 먼저 읽고 시작할 수 있다면 —
관계는 조금 더 다정하게,
오래도록 작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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