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해서 이제 그만 쉬라고 서둘러 신호를 보낸다. 자꾸 눕고 싶고, 눈이 감긴다. 딸 3호를 침대로 유인해서 좋아하는 잠자리 동화책을 맛깔나게 성우처럼 읽어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3호는 번개같이 일어나서 글밥이 많은 디즈니 공주 동화책을 껴안고 와서 내 입에 손사락으로 꾹~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마지막이란 구두 약속을 하고 대충 그림에 맞춰 이야기를 지어낸다. 아직 한글을 다 모르는 3호라 가능한 트릭이지만 이 트릭을 쓸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단 걸 감사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감정이 교차한다. 그렇게 딸 3호는 꿈나라로 곧장 직행한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내겐 아직 2호의 학교 과제를 챙겨야 할 의무가 남았다. 아들 2호의 *받아쓰기. 수학 연산. 영어 파닉스. 매일매일 조금씩 하기로 한 약속을 특별히 못 지키는 날을 제외하고는 큰 거부감 없이 해주는 게 기특하다. 노력 대비 결과가 눈부시게 좋지만은 않다는 건 좀 속상하지만, 2호가 나만큼 속상해하지 않고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해 내는 걸 보니 나보단 큰 배짱 주머니를 마음에 하나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곧이어 2호도 기분 좋게 꿈나라로 간다.
*받아쓰기
아들 2호와 가장 많은 기싸움하는 주제는 ‘받아쓰기’다. 작년 코로나19로 초등 1학년을 그냥 통째로 건너뛰어 버린 아들 2호는 교육부 지침대로 선행 학습을 하지 않는 병설 유치원을 졸업하고, 정신없이 바쁜 직장맘을 둔 이유로 한글을 완료 하지 못 한 채 2학년이 되었다. 한글이 안되면 수학 문제를 읽거나 이해할 수 없으니 수학도 안되고, 독서통장도 스스로 읽고 쓸 수 없다. 좀 더 나아가면 2호에게 학교는 감옥 같을 것이고, 수업시간에 주눅 들고 참여가 소극적이기까지 하면 정상적으로 되돌리기가 어려워진다. 아차 싶은 순간은 이미 늦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엄마는 위대하기에 이대로 손을 놓을 순 없다. 아들 2호를 위해 퇴사를 했다. 그리고 첨부터 초등 1학년 수준부터 시작한다. 공부에 흥미 잃은 눈동자를 마주하기가 괴롭다. 2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자책하게 만든다. 그럴수록 초인적인 인내심과 2호 수준에 맞는 학습 양을 같이 정하고 아주 만족스러운 보상체계도 만들었다. 받아쓰기 1급부터 15급까지 1학기 분량을 매주 공부하면서 확연히 달라진 2호의 공부 태도와 받아쓰기 10문항 성적이 감동적이다. 아빠 엄마의 우월한 유전자만 골라서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2호가 이쁜 말을 한다. 본인도 꽤나 흡족한 모양이다. 2호의 자존감이 튼튼하게 한 레벨 올라가길 바라본다.
아들 2호가 성과보상시스템에 최적화된 단시간 집중력으로 매일 공부 주머니를 채워가고 있다.
21:30
아들 1호가 학원과 태권도까지 마치고 친구들과 놀이터 수다타임 후 현관 비번을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귀갓길 해피콜은 당연하니 받아준다. 약간은 예민함을 더한 날카로움 섞인 지친 목소리라는 걸 1호도 눈치껏 안다. 씻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1호의 뒷모습이 또 짠하다. 만두 구워서 좋아하는 탄산음료를 권한다. 자기 전까지 컴퓨터 게임을 할 거란 걸 알면서도 나름 치열하게 하루를 보낸 1호가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라면 잔소리 말자고 다짐하면서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는다. 이게 엄마 방식의 배려임을 아들 1호는 알랑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