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정은 안녕하십니까
"애플"
시리즈는
지금 전 세계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써보고 싶은
"머스트 해브 must have 아이템"
같은 존재다.
2023년에
삼성은
수익성을 위해 중저가 부문에 집중했지만
저가 부문에서
점유율을 잃었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선두 자리도 잃었다.
반면에
애플 Apple은
하이엔드 세그먼트에서 견고한
지속적인 수요 덕분에
지난 2년 동안 회복력을 보였는데,
iPhone 15 시리즈의 확장된 포지셔닝은
더 광범위한
소비자 세그먼트에 도달하려는
Apple 포트폴리오 전략의 미래 방향을
보여준다.
아니
배우자의 외도와
"애플, 삼성간의 대결구도"가
대체 뭔 상관인가
그러던 와중!
그들은
"제대로 된 기업 문화"
야말로
기업 성공을 위한 필수요소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농경사회는
"협업으로 인한 생산성 증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자신을
덜 갈아 넣고도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그 도움의 깊이와 넓이가
보다 광범위하게 확장될 수 있는,
이른바
"진보된 타인"으로서
인류가 존재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시대였던
것이다.
전기차의
"ㅈ"자도 몰라도 전기차를 타고,
논에
모내기 한번 안 해보고도
쌀밥을 매일 먹으며,
원양遠洋엔
생전 한 번도 가본 적 없이도
원양어선에서 잡은 싱싱한 참치회에
"캬~~~ "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
우리는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저나 죽지
왜 애까지 데리고 가냐."라고
홀로 남은 애를
자기가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엄청
인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양
인터넷 댓글에
수십 년째 비난을 남기지만
우리 주변의
모든 "쉽게 이해되기 힘든 타인들"
존재의
근본 원인이며
우리 인간이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왜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가장 명쾌한 대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판단의
전문가로서의 특성과
또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의 특성
또한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법정 상황에서
편향된 판단과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앞서 설명한
"투사"의 전형적인 예로
어쩌면
전문가이기에 앞서 "한 명의 인간"이기에
너무도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었을까?
"은퇴한 남편 분"이
계셨다면
"가운데서 저 남편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정말 힘들겠다."라고 생각하며
가족 중
"남편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존재"라고
여겼을 가능성도
우리는
전혀 배재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서로의
다른 관점들을
계속 새롭게 알게 되고
또
진심으로 이해해 보는 과정만 허락될 뿐,
어느 누구라도
남의 관점을 비난할 권리는
가질 수 없고
또
가져서도 안 되는 것은 아닐는지
우리가
가족 구성원들에게 기대하는
많은 반응에는
상대와 나의 "가족이라는 특수 관계"
프레임이
항상 전제되어 있고
"가족"
이라는 타이틀은
우리 모두에게
종종 많은 비논리적 관계 구축을 요구해
결국
이 부담이 우리를 다양한 갈등 상황에
놓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개인적으로는 자존감 상승과
대외적으로는
책임감 증가의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각 직원 모두에게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최대치를 이끌어내도록 견인"하는
결정적인 동력으로
작동했음
The Heart Has Its Reasons
That
Reason Does Not Know'
상대의
특정 부분의
독특한 냄새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머릿결이나 목소리, 또 아니면 가끔 집중할 때 삐죽이 나오는 입술이나,
심지어는
언뜻언뜻 보이는 뽈록 나온 똥배 등,
즉,
이렇게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부터
이미
그 대상과 그 행위는
"객관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평가될 대상"
리스트에서
일단 빠지고 시작한다.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을
"영장霊長"감투는 씌워 놓고
대충
아무와 만나도
막 호르몬이 나와 눈이 맞고
또
아무나 만나다 보니
그저 평생을 걸핏하면 진탕 싸우다가
때 되면
삶을 마감하도록 설계했을까?
"제눈의
안경인 상대"와
"진짜 사랑에 빠지게 만든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저마다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사람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저마다의 특색을 가진
가족문화를 만들어 가정을 이끌어가며
또
그 가족 고유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양육해
또한
"수줍음"이나 "불안" 등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 있는 반응인 감정들까지도
현대에 와서
DSM 등 인위적인 잣대에 의해
과도하게
‘질환’이나 ‘장애’로 탈바꿈되고 있다
희박한
과학적 정당성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빈약한 논리를
바탕으로
수백 가지의 자연스러운 감정 반응들이
"정신장애"로 정의되면서
약물 치료가
요구되는 질환으로 간주되어
결국
돈벌이가 되는 현 사태
일단,
일정 수준이상이 되면
논리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데이터들은
자연스레
외면받으며 걸러지게 되므로
이렇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를
반복하는
"인간적 사고의 산물"에만 온전히 맡기기엔
"우리의 삶"은
결코 짧지 않고
또,
너무
"소중"한 것 아닐까?
"사람"이 있어야
모든 서사가 만들어지는 인간사에서
결국
인류의 역사는
"사람人"을 만드는 "사랑愛"에서 시작해서
"사랑愛"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그들 역시
모두 다 다른
"외모, 성장배경, 지능, 성격, 재정상태"
심지어
"정치성향"까지
다 다른 사람들일 텐데
같은 환자 즉 같은 내담자의 상황에 대해 다
다른 이해도, 해석들과
또
솔루션을 가지고 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여러 가능한 관점들 중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게 된 자신만의 관점 및 도출과정은 무엇이었는지
설명한 후
적어도 자신이 생각했을 땐
이 방향이 최선이지만
("투사"의 원리는 "전인류 공통"이니 )
관점에 따라
다른 의견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음을
알려야 하는 건 아닐까?
주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의 임상 및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해
전 세계인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에는
태생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박사님들이
미국사람들을 상대로 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지극히 미국적인 정서와 문화에 입각해 만든
말 그대로
미국식 진단 기준을
"니콜라이 달"과도 같은
내게
최적화된 전문가를 스스로 선택해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 가정의 문제해결을 도모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더욱 필요한 것 아닐까?
당시,
프랑스 최고의 시음가였던 심사위원들이
모두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캘리포니아산을 선택했고,
이 일은 결국
단 한 번에
"고급 와인은 유럽에서만 나온다"라고
생각했던 시대를
끝내며
즉,
어떤 분야든
"가치와 무게의 절대 반지"를 자청하는
이들을 위한
무대들은
점점 좁아지는 것이 시대의 흐름인
가운데,
"파리의 심판"같은 일이
꼭
"와인" 분야에서만 있으라는 법은
없는 법
잘나면 잘난 대로
그 장점을 이용해 세상 발전에 기여하고
또
못나고 열악하면 열악한 대로
대중이 알기 어려운
귀한 실전 경험과 극복 스토리를 나누며
"소리 없이 고통스러운 다수"
에게
힘을 주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이런
기회들을 통해 발견된
다양한
능력 있는 전문가들의 다양한 솔루션을
우리가
손쉽게 접하게 됨으로써
내담자와 전문가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면
우리가 꿈꾸는 이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우리는 그럼 왜
나와 다른 사람과 눈이 맞도록
설계되었으며
또
어떤 방법으로 이 상극들이 만나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