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 정치·경제·과학·예술‘ 분야의 정상 자리에는 늘 유태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적은 수의 인구로도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며 주요 자리를 꿰찬 유태인들은 특히 그렇게 뛰어나게 유태인들을 길러낸 유태인 특유의 교육법으로도 유명한데 그 가운데 ’ 유태인 어머니‘가 있다.
"유태인은 어머니가 유태인이어야 유태인이다"라는 탈무드에 나오는 말처럼 유태인들은 가정 내(內)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혈통적으로도 모계 혈통을 따르고 있는 그들은 아버지가 아무리 훌륭한 유태인이라고 하여도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자녀의 성(姓)은 아버지를 따르겠지만 그 자녀는 ’ 유태인‘이 아닌 '이스라엘인'이라고 등록하게 할 만큼 ’ 전 세계 자녀 교육의 메카(Mecca)‘인 유태인 가정에서 어머니의 지위는 절대적이다.
’ 집안에 엄마가 없으면, 그 집안에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는 유태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엄마를 보냈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어머니이고 따라서 아이들은 자연스레 어머니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익히게 되므로 적게는 어머니의 사소한 말버릇에서부터 행동, 습관, 나아가 사고방식까지 아이들에게 미치는 어머니의 영향은 평생을 좌우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네타냐후 총리의 이스라엘 우파 정부가 유대인들의 최대 순례 장소 가운데 하나이자 ’ 통곡의 벽‘으로도 불리는 ’ 예루살렘 서벽‘에 ’ 남녀 공동 기도소‘를 설치해 양성평등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계속되는 초 정통 유대 세력의 압력에 굴복해 이를 취소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시 60여 석의 아슬아슬한 다수를 유지하고 있는 네타냐후 내각으로선 연정 중인 초 정통 유대 계열 정당이 하나라도 이탈하면 내각이 무너지기므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라고도 한다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 남녀 공동 기도소‘ 그게 뭐라고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잔뜩 배출해내고 있는 유태인들임에도 불구, 그들 역시 사람인지라 그랬는지 어쨌는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부분에서 그 구멍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참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게 했던 기사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그래도 어찌 되었든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수적으로 월등히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유태인 사회가 이렇게 전통적으로 극한의 남성 중심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집안에서 어머니라는 존재의 중요성에 대해 확실히 인정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기사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는 어쩌면 그들이 어머니 존재의 중요성을 신이 되었든 혹은 누구의 가르침에 따라 존중하는 것이나 ’ 남녀평등정신‘ 뭐 이런 것들을 다 떠나 유태인 자신들도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온몸으로 그 역할의 절대적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반증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동생을 잃고 일 년여를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진 상태로 지냈을 때 우리 집은 다른 집 같았다. 앞서 언급했듯 태생적으로 노는 것도 좋아하고 재미난 것도 좋아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던 나는 결혼 후 물론 종종 남편과 아이 문제로 다투기도 했으나 동갑내기 연애결혼 커플답게 매일 저녁 남편과 아이 나 이렇게 셋이 반주를 곁들인 시끌벅적하고 유치하지만 재미있는 저녁 시간을 가지곤 했다.(물론 술과 함께다 보니 그러다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다.)
윗몸일으키기 내기나 팔 굽혀 펴기 누가 누가 많이 하나 내기를 하기도 하고 우리가 젊었던 시절 유행하던 노래를 갑자기 막 부르기도 하고 옛날 서태지와 아이들 춤 같은 것을 말도 안 되게 추면서 애기한테 막 가르쳐주기도 하고(쓰다 보니 남편과 내가 좀 덜떨어진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정치 성향이 정반대였던 탓에 관련 이슈가 있는 날엔 상대방이 지지하는 정치 세력에 관해 신랄한 비판을 직구로 마구마구 날려주기도 하고.....(이제는 이후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결국 다들 ’ 거기서 거기‘인 것을 깨닫고 둘 다 중도층이 되었다.) 좌우지간 좋은 뜻에서든 나쁜 뜻에서는 조용하고 무미건조한 날들이란 없었다.
그러던 내가 동생의 죽음 이후 일 년 여를 마치 축 늘어진 빨래처럼 입은 닫고 동공은 풀린 채로 좀비처럼 살고 있을 때 우리 집은 다른 집 같았다.
아빠가 퇴근할 무렵인 7시 즈음이면 시작되던 매일매일의 왁자지껄한 우리들만의 파티가 사라진 우리 집은 마치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데 음소거 처리를 한 것 모양 조용했고 무거운 기운이 안개처럼 온 집안에 가득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남편이나 아들은 특별히 변한 것이 없었다. 그저 전날 남편이랑 싸웠어도 그 담날 장 보러 가서 “아이고 이 화상을 내가 아니면 누가 또 거둬가랴 달래서 데리고 살아야지~~” 하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남편이 좋아하는 식재료를 잔뜩 사 와 가지고는 또 여지없이 투덜이 스머프인 남편이 음식 맛이 어쩌네 저쩌네 타박을 하더라도 “에이~그냥 먹어~~.” 하며 맘 좋고 뱃살 넉넉한 순댓국집 아주머니 모냥 남편에게 술을 한 잔 넘치게 따르며 반주를 권하고는 본인은 워낙 술에 젬병인 탓에 한 잔만 먹어도 얼굴이 벌게 지면서도 몇 번을 술잔이 오가고서야 넉살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통 찾을 수 없는 냉혈 인간인 남편이(결혼해서도 아직도 제발 자고 가라는 우리 친정 아빠와 남동생의 애원에도 자기는 절대 다른 집에서 못 잔다며 오밤중에 대리 불러 가는 등 우리 친정집에서 잠을 잔 것이 몇 번 안될 정도로 좌우지간 어딜 가나 지 친구들 빼고는 제멋대로인 인간이다, 이 사람이. 다시 생각하니 참 열이 받는구나) 못 이기는 척 굳었던 얼굴을 펴면 나는 마치 장터에서 광대 옷을 입고 엿을 파는 엿장수처럼 우스갯소리도 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우리의 저녁 시간을 아주아주 즐겁게 만들도록 부단히 도 애를 썼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세 식구가 유일하게 모이는 저녁시간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언제나 원했고 그러기 위해 내가 되어야 한다면 국밥집 아줌마도 되었고 바텐더도 되었으며 읍내 노래자랑 사회자도 되어 우리 세 식구가 오늘 하루의 피로를 씻고 내일 또 험한 세상에 나가 각종 예기치 못할 일에 부딪히더라도 다 척척 씩씩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그 저녁 서너 시간 동안 충분히 충전하는 일에 나 자신이 오롯이 쓰이기를 원했었다.
그러던 내가 동생이 죽은 후 마치 여름날 밤 갑자기 끊긴 전기처럼 휴즈가 나가버리자 우리 집은 적막강산이 되었고 그 어떤 사회자도 저녁 파티의 분위기를 끌어올리지 못했다.
매일 저녁 열리던 파티는 잠정 중단이 되었고 조촐한 저녁시간, 졸지에 사회자를 잃은 남편과 아들은 번갈아가며 사회자를 자청했으나 워낙 초짜들이라 매번 영 시원치 않았다.
그저 과하게 부산스럽고 떠들썩하던 사회자에서 이젠 말없이 관망하는 단순 참석자로 자리를 이동한 내가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마시고 소파에서 자다 깨면 허리춤에 오는 어린 아들이 자신의 키만 한 의자에 올라가 온몸에 거품을 잔뜩 묻히고는 설거지를 하고 있곤 했고 그때부터 아들은 내게 아들 그 이상인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