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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 킹덤 단상

명동. CGV. 애니멀 킹덤.

by Gozetto Mar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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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잔인한 비명과 아름다운 외침이 공존하는 변신의 시대(4.0)


인간의 존재론적 근본과 혐오에 기반한 인식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이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어떤 이유인지 모르는 가운데 동물로 변하는 사태는 카프카의 <변신>을 떠오르게 한다. <변신>이 아니더라도 당장 최근 갑자기 무슨 이유로 그런 밈이 확산되었는지 모르지만, 혹은 "If 뭐시기"의 연장선이지 않을까 싶은데 "만약 내가 바퀴벌레가 된다면"이라는 밈도 떠오른다. <변신>, "만약 내가 바퀴벌레가 된다면" 밈과 <애니멀 킹덤>의 유사성을 살펴보자면 '나'가 다른 존재가 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묻는 것, 즉 인간에게 다른 존재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파리가 되었든, 바퀴벌레가 되었든 그것이 '나'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외면 혹은 인식에서 비롯된 거부감과 혐오가 있다면 그 '것'으로 인식한다 혹은 인식된다는 두려움을 읽을 수 있다.

출처. 왓챠피디아출처. 왓챠피디아

<애니멀 킹덤>은 이러한 전제를 근미래 프랑스의 한 가족을 통해 드러내는 현대적 우화이자 동시에 혐오가 만연한 오늘날에 대한 우화이다. 이 영화의 배경 자체가 근미래라는 점을 기억하자. 어떤 이유로 인간이 동물로 변화하는 사태는 직관적으로 문명 혹은 사회에서 배제되는 순간이 어느 개인에게나 부지불식간에 찾아올 수 있음을 알려준다. 배제의 순간이 왜 발생했는지는 그 누구도 규명할 수 없다. 그저 혐오에 기반한 인식에 휩쓸리며 배제당할 뿐이다. '프랑수아(로맹 뒤라스 분)'와 '에밀(폴 키르셰 분)'의 아내이자 엄마는 동물로 변이되자 강제로 국가에 의해 '보호'라는 명분 하에 보호구역에 갇히게 된다. 에밀이 전학간 학교의 학생들 중 대부분은 그런 변이된 사람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그들이 자신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공포 혹은 그럴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니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무의식적 공격성을 보인다. 보호구역에 갇힌 인간-동물들은 치료라는 목적 하에 강제로 자신들의 신체를 훼손당한다. 이른바 정상 인간으로 규정된 외형을 벗어날 경우 그 외형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인간을 어떻게 정의한다고 해도 감각적으로 작동하는 혐오적 인식은 언제나 이성적 판단의 성을 아무것도 아니란 듯 허물어뜨린다. 그리고 혐오적 인식의 작용은 과거보다 오늘날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제는 신체의 일부와 다름없는 스마트폰과 인식의 일부인 SNS를 통해서.


영화에서 눈여겨 봐야 할 장면 중 하나는 개로 변이되어 가는 에밀이 도시 한복판에서 스치듯 만났다 깊은 숲속에서 다시 만난 '픽스(톰 메르시에 분)'가 오랜 날기 시도 끝에 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인간인지 짐승인지 구분할 수 없는 환호를 지르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에밀은 인간으로서 소리를 지르는 것인가 아니면 개로서 소리를 지르는 것인가? 인간과 새의 외관이 뒤섞인 픽스는 새이기에 날고 있는가 아니면 수인으로 날고 있는가? 애초에 존재에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 장면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두 인물 모두 인간 혹은 동물이라는 경계와 무관하게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에밀이 개로 변이 중인 것을 알게 된 '니나(빌리 블레인 분)'와 '빅터(가브리엘 카발레로 분)'의 상반된 태도나 사람들에게 쫓기는 에밀을 놓아주는 프랑수아의 모습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에밀이 개로 변하는 것을 알고 있는 니나는 에밀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를 안심시키며 그의 비밀을 지켜주려 하고 그것이 잠깐의 감정일 뿐일지 몰라도 혐오적 인식이 아니라 에밀이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을 나눈다. 반대로 빅터는 에밀이 개로 변이 중이라는 것을 알고 혐오적 인식에 따라 초음파 발생기로 에밀에게 고통을 주며 자신의 유희를 충족한다. 과연 오늘날의 시대에 니나와 빅터 중 누가 더 많을까?

출처. 왓챠피디아출처. 왓챠피디아

프랑수아의 변화도 눈여겨 봐야 한다. 영화에서 프랑수아는 경계에 선 인물이다. 그는 동물로 변이하는 아내가 정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목도해야 했으며 살기 위해 인간-동물을 혐오하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하며 넘겨야 하는 사람이다. 프랑수아가 원하는 것은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아내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인물이다. 가족이 인간-동물이기에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으나 동시에 인간-동물이 된 아내가 인간으로 되돌아오길 바라는 인물. 그런 아버지의 모순을 알고 있기에 에밀은 자신이 개로 변하는 것을 숨기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밀이 개로 변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프랑수아는 마을 축제 중 빅터를 공격해 마을 사람들, 경찰, 군인들에게 쫓기게 된 에밀을 지키기 위해 깊은 숲으로 달아나려는 에밀을 놓아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프랑수아의 눈빛은 여전히 모순적으로 느껴지지만 동시에 그가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수아의 눈빛은 아내에 이어 자식과도 헤어져야 하는 아버지로서 슬픔에 더해 인간-동물이 인간으로 되돌아오길 바라는 것보다 인간-동물로서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수아의 눈빛은 호수를 나는 픽스를 향한 에밀의 외침과 교차한다. 청각과 시각이 교차하는 <애니멀 킹덤>의 결말은 극단적으로 인식적 양극화를 겪고 있는 오늘날을 겨냥하는 듯하다. 우리의 시대는 혐오적 인식에 기반한 잔인한 비명과 환대하는 인식에 기반한 아름다운 환호가 공존하고 있다. 둘 모두 외적으로 차이를 느끼기는 힘들다. 다르게 말하면 그렇게 외치고 있는 이가 인간인지 동물인지, 지금과 이후의 시대에서 이른바 애니멀이라고 하는 짐승은 누구일지 혹은 누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으로 동물의 왕국이 도래한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로서 외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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