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속도는 참으로 이상해서 점점 더 빨라진다. 어릴 땐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빨리 잡아당기고팠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시간이 자꾸만 냅다 달리는 통에 앞질러 가서 뒷덜미를 잡아끌고 싶어 진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지나온 시간이, 현실의 나이가, 지나치게 선명해지며 시아를 가리던 날.
아이들을 보내고 밀린 집안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한숨이 '훅~~' 하고 저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오더니 눈꺼풀과 입꼬리가 내려앉으며 기분이 다운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날이었다. 그저 똑같은 날이었다. 다만, 40이란 숫자가 뭔지, 그 숫자가 내 이름 옆에 붙은 이후 종종 이런다. 이런 날엔, 과감히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한다. 안 그랬다간 우울을 크게 한 입 쌈 싸 먹고 이 친구, 저 친구를 괴롭히거나 저녁마다 식구들을 들들 볶을 수 있다. 그러니 잠시 눈을 붙여 신체 에너지라도 신나게 돌도록 하든지, 재밌는 걸 찾아 정신이라도 방긋 전환시키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육아 초기엔 주로 코미디 프로를 보며 혼자 1시간 내내 웃는 방법을 사용했다. 나는 어쩐지 낮잠을 자고 났을 때 기분 좋게 일어나 지지 않아서 신체를 북돋는 일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정신과 감정의 세계를 돌보아야 몸이 따라가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첫 아이를 낳고 돌 때까지 그러니까 엄마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첫 아이의 육아기간 동안엔 '무한도전'을 그야말로 무한히 돌려보았다. 그때에는 봐도 봐도 또 웃겨주는 '무한도전'이 있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때는 신체적으로도 젊어서 그랬는지 한 바탕 그렇게 웃고 나면 아이의 미소가 또다시 사랑스러웠다. 다행인 것은 둘째는 첫째보다 수월해서 꼭 무한도전이 아니어도 다른 코미디 프로나 드라마를 보며 웃고 나면 또 시간이 훌쩍 갔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의 발달상 찾아오는 고비들마다 나만의 웃음 코드를 찾아 이겨내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tv를 켜고 웃을 만한 프로를 찾고 있었다. 전보다 한숨이 더 자주 나오긴 했지만, 다행히도 웃고 나면 또 금세 잊는 긍정형이라 그날도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무언가 걸려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 멈춘 것이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었다. 제목 첫 단어는 ‘멜로’로 시작하지만 그런 장면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젊은 이들의 고민인 사랑과 일, 직업적 성공과 삶에 대한 고민과 성장과정이 담긴 코믹 드라마였다. 안재홍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천우희의 맛깔난 대사가 재밌어 전에도 몇 번 보았던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낄낄거리다 추스르고 일어나야지'하며 보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날, 나도 모르게 펑펑 울고 말았다. 드라마는 여전히 유쾌하고 발랄했다. 그날은 드라마 속 임진주(천우희)가 입봉 후 자기만의 작업실을 구하는 장면이었다. 오랜 시간 서브 작가로 일하며 설움을 겪던 임진주가 자신의 대본으로 드라마를 제작하게 되고 드디어 작업실을 얻어 자신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꿈을 향해 나아갈 발걸음을 그려보며 기쁨을 만끽하는 장면이었다.
분명, 유쾌하고 신나는 장면과 그에 걸맞은 대사들이었는데, 나는 그걸 보다 펑펑 울었던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제어 불가능한 상태로 올라오는 울음이어서 나의 이성조차도 우는 이유를 분명히 찾아내지 못했고, 손은 반사적으로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고 있었다.
2019년. 그러니까 40대 초반. 나의 이성은 이유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내 손과 내 시간을 오롯이 요구하던 시절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제 무언가 할 수 있는 그런 때였고 무언가 하고 싶어서 둘러보며 노력하던 중이었다.
그날, 나는 모든 일을 멈추어야 했다. 통제할 수 없이 왈칵 쏟아져 내린 눈물의 의미를 되짚어 보아야 했고 내 눈물샘까지 차 올라 있던 생각과 감정의 실체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저 예능이 주는 잠깐의 웃음으로 전환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날 밤을 뒤척이고 그다음 날과 그 그다음 날도 내게 묻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 다만, 그즈음의 내게는 몇 가지 단서가 있었다.
'하던 일로 돌아갈까?'
'아니, 시간을 쌓지 못했어. 가도 할 수 없어.'
지식노동자였던 나는 육아로 10여 년의 시간을 보냈고, 일에만 전념하며 경험과 지식을 쌓았을 지난 동료들의 지식의 양을 쫓을 자신이 없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그럼, 새로운 일을 할까?'
그렇잖아도 여러 가지 일을 해 보았으나 이제와 누군가의 밑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과정이 여간해선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니 나의 부족한 자아는 꿈꿔왔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의 괴리를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마도 나는 그날, 드라마 속 주인공들인 20대의 고민과 성장을 보며, 나를 다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십다. ‘너는 무엇을 했냐?’고. ‘20대 후반에 했던 고민을 어쩜 너는 또 그렇게 하고 있냐?’고. 그 질문은 20대에는 당연히 해야 하는 물음들이기에 주변에서도 인정과 격려를 보내는 질문이지만, 40대 중반을 넘어선 내겐, 질책과 비판이 담긴 나를 사방으로 옥죄는 질문이었다. 나는 극 중 임진주의 성공 앞에서 나의 무능을, 여전한 부족함을 선명하게 마주했던 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열심히 키웠다. 그 기간 동안 나 역시 성장했다고 믿었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엔 너무나 큰 보람과 기쁨이 있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다시 그때처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나는 다시 서고 싶었다. 지체하지 않고 다시. 어쩌면 너무 큰 욕심일 테지만, 열심히 살아온 만큼 다시 서고 싶었다. 어쩌면 육아 초기엔 육아가 끝난 후엔 더 높이 우뚝 서 있으리라는 무모하리만큼 어리석은 기대를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은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이리도 힘든 것을 보면, 기대가 지나치게 컸음이 분명하다. 물론 육아 기간 내내 재택으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사회적 성과를 묻는 질문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에도 많은 밤들을 뒤척여야 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나의 긍정적 성격과 열정은 나이가 든다고 쪼그라들진 않아서 나는 다시 나를 끌어다 세울 수 있었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럼, 언제까지 넌 이러고 있을 거니?’
분명, 아이들을 키우며 자신 있었지 않은가. ‘꼭 무언가 되리라’ ‘하나를 오롯이 마치고 또 다음으로 넘어가리라’ 다짐했지 않은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주저앉아만 있을 것인가?
하루가 다르게 시간은 빨라지고 있다. 40대의 시간은 20대의 시간보다 어쩐지 반도 안 될 만큼 빨리 흘러간다. 어쩌면 우물쭈물하다가 70 혹은 80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70에도 청소하다 말고 주저앉을 것인가? 80에 드라마 보다가 울 것인가?
그땐 울어봐야 소용이 없다.
지금이다. 지금 당장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간 생각해 오던 것이 있지 않은가?
그중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만반의 준비는 다음 생애나 하고 이번 생엔 일단 도전해 보아야 한다. 오늘 안 된 준비가 내일이라고 완벽 할리 없다. 아니, 완벽히 준비된 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준비는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이루어가면 된다. 현장에서 실수를 통해 얻는 배움만큼 실제적인 것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