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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파스 냄새

일상성찰

by 최선화 Jan 26. 2025

10년 전인 듯하다. 대전에 있는 한 편집숍에 들어갔을 때, 멋진 캘리그라피 글씨를 담고 있는 달력을 보았다.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니, 어느 한 장에 “삶은 달걀”이라고 쓴 멋진 캘리그라피와 그릇에 달걀 몇 개가 담겨있는 그림, 그리고 6월 날짜들이 담겨 있었다. “삶은 달걀이라...”위트 있는 작가에 웃음이 났다. 열두 장 달력 중 그 한 장이 몇 년이 지났지만 기억에 남아있다. 언어유희를 사용한 삶의 정의가 꽤나 인상 깊었나보다. 그때 왜 삶은 달걀일까를 고민했다. 깨질까 다칠까 조심조심 살다가 조건이 충족되면 무언가의 쓰임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생명이 되기도 하고, 깨지고 나면 부질없는 것으로 되어버리는 달걀의 속성을 보자니, 삶은 달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연말 나의 최애 작가인 은유 작가가 구청에서 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선착순에 밀릴세라 서둘러 신청을 했다. 그리고 그날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강연 당일, 나는 강연장으로 향하는 저녁이 되기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작가의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었고, 작가와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를 생각했다. 어떤 질문을 하면 작가의 기억에 남을지, 어떤 책에 사인을 받는 것이 좋을지, 작가님과 사진을 함께 찍자고 요청할지 등을 생각하고 정하며 혼자서만 바쁜 시간을 보냈다. 


강연시간 7시에 맞춰 구청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하도를 올라와 왁자지껄한 수유역 번화가를 걸었다. 머릿속엔 온통 작가 생각뿐이었다. 유흥가 수유역에는 유난히 전단지를 배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단지 배포하시는 분들을 한 명 두 명 잘 지나쳤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이 역시 전단지를 받지 않는 비법이군! 하며 좋아할 때, 갑자기 내 코에 진한 파스 냄새가 들어왔다. 그 순간, 온통 오늘 강연의 기대감으로 가득 차있던 나의 정신은 순식간에 깨졌다. 그리고 단지 파스냄새만 남게 되었다. 마치 드라마 속에 나온, 주변은 흑백으로 변해 정지되어 있고 주인공만 색깔을 가지고 움직이는 그 장면 같았다. 은유 작가는 온대간대 없이 나는 파스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 쳐다보았다. 역 출구에서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는 나이든 아주머니였다. 기계적으로 종이를 나눠주고 기계적으로 피하고 기계적으로 받는 사람들 속에서 파스냄새야 말로 비로소 이곳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나는 갑자기 목이 메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는 설렘 가득 찬 마음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누군가는 파스를 붙이고 고단함 가득 찬 몸으로 수천 수백 장의 종이를 건네고 있는 상황이 순간적으로 나에게 보였다. 겉으로 보아선 나의 설렘도 그녀의 고단함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설렘은 내가 포옥 감싸 나만이 향유할 수 있도록 감춰두었고, 그녀의 고단함은 몇 장 안 되는 파스를 피부 위에 붙였기에 옷으로 감싸 그녀만이 알 수 있도록 감춰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냄새가 밖으로 나온 것이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아, 삶은 파스 냄새구나. 감추고 싶지만 감출 수 없는 고단함, 고단함 위에 파스를 붙이고 다시 종이를 들어 손을 건네는 그 행위 하나하나가 삶이겠구나. 자신의 위치에서 죽음이 아닌 생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 파스 냄새를 한 곳에 잠재우는 게 아니라 옆으로 퍼지게 만드는 저 행위가 삶인 것이구나. 코끝에 아직 파스냄새가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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