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움직여야 할 때가 찾아온다.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움직이지 않고는 못 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날. 유독 힘들었던 날들을 보내고 주말이 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 하기 싫어서 침대 위에 누워있게 된다. 죽은 듯 살아있었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이젠 일어나야 할 때가 왔구나, 하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본능적이라기 보단 물리적인 건가, 당연한 말인데 허리가 아프다. 무튼, 그럴 때면 나는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곤 한다. 한번 나가면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은 걷고 오는데,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오랫동안 하게 되는 것 같다. 예전부터 걷는 걸 좋아하긴 했었다. 그때는 산책을 했던 장소들마다 나무로 가득했었는데, 계절마다 다르게 느껴지던 나무의 숨결 자체가 힐링이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어떻게든 바뀌는 계절을 느끼고 싶어 하는데, 여행을 가지 못할 때면 동네라도 산책하면서 나무들을 찾아가곤 한다.
중학교를 다닐 때 까지는 온 가족이 집 근처에 있는 큰 공원에 저녁 운동을 하러 갔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친구들과 함께 석식시간에 나무가 가득한 운동장을 산책하곤 했었다. '우리 걷자'가 아니라 '거닐자'로 시작됐던 야자 시작 전의 루틴. 무슨 이유였는지 몰라도 지금까지 저 단어가 마음에 드는 걸 보면 그때의 감성이 아직 남아있나 보다. 세상의 고민이란 고민은 다 내 것인 것 같았던 19살의 우리는 고3답게 정말 감성적이었고 예민했었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았는지, 인생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사회, 종교, 진로와 꿈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참 많은 얘기를 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누는 이야기보다 더 심오한 내용들이 가득했던 것 같아 피식- 하고 웃음이 흐른다. 그때 생각했던 30살의 나는 모든 면에서 완성된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부족하고 모르는 게 많은 것 같아 완성된 어른이라는 타이틀이 멀게만 느껴진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어른이라는 말이 이렇게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도 되는 건지.
지금의 상태로 20대를 다시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좋은 기억만 갖고 살 수는 없는지라 힘들게 버텨온 지난날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사실 더 크다. 이제야 제대로 뭔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서른 살이라는 나이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왜 이렇게 낯설기만 한지. 아직 뭐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들 하지만, 그건 상대적인 말이지 않을까. 그렇게 체감할 수밖에 없는 게, 장난이라도 오가지 않았을 법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요즘은 내가 30대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지금은 초반이라서 요리조리 잘 피해 가지만, 정해진 사회의 흐름대로 살아가기 싫어하는 내가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조금은 걱정이 된다. 피부에 와닿지 않던 현실이 살갗을 스쳐갈 때면, 쓰리다 못해 정말 쓰러질 것 같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무조건 바로 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옮기곤 했었는데, 지금은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발에 한가득 묶여있어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그래도 예전처럼 빠르게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버텨온 시간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리고 가끔 너무 힘들어져 기운이 없는 날이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충전하는 시간만큼 더 단단해질 나를 믿기 때문에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내가 이렇게 단단해질 수 있도록 나에게 가장 큰 힘을 준건 산책이었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 거닐었던 산책은 이제 쉽게 할 순 없기에, 온 마을이 시끄러울 때면 걱정이 많은 나를 데리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노래를 들으면서 힘이 빠질 때까지 한참을 걷다 보면 걱정 많던 나는 어느새 사라지고,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의지가 가득 찬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글을 쓰는 것도 하나의 산책 같아졌다. 이 산책 역시 떠나기 전까지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오래 걷기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편해졌달까. 오늘은 정말 침대에 원 없이 누워만 있었으니, 내일은 또 다른 나를 위해 거닐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