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rlotte Jan 21. 2022

부산역으로


힘들기만 했던 출근길이 반가워질 때도 있다. 바로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창 밖의 풍경을 마주할 때다. 오늘처럼 화창한 날엔 이 순간이 잠시만, 1분만이라도 멈췄으면 하는 마음에 눈이 부셔도 가리지 않고 꼭꼭 담는다. 뜻하지 않게 광합성을 하는 날이면 따뜻한 온도의 책을 찾게 되는데, 이럴 땐 여행 관련된 에세이가 찰떡이다. 나는 비록 회사를 향해 가고 있지만 마음이라도 떠날 수 있게 보내주는 느낌이랄까. 운이 좋게 마음이 잘 맞는 작가님을 만나게 되면 지루하게 느껴졌던 지하철 안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어지는 신기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인스타그램에서 만난 어느 디자이너님 덕분이다. 언제 도착하려나, 의욕 없는 표정으로 지하철 안에서 인스타그램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아이패드로 다이어리를 꾸며 놓은 게시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일기 쓰는 걸 정말 싫어했었는데, 사춘기를 겪었을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혼자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지 매년 다이어리를 빼곡히 채우곤 했었다. 그날 집에 와서 그때 당시에 썼던 다이어리를 찾아봤는데 내가 너무 귀여웠다. 그때는 이런 고민들을 했었구나, 싶으면서도 잊고 지냈던 추억들이 생각나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10년 뒤에 꺼내어 보는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떨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게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정도 썼을 무렵이었을까, 기록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읽고 보는 것들에 대한 리뷰도 쓰고, 여행일지도 따로 기록해서 생각날  꺼내볼  있는 책처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머릿속을 스쳐지나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사진들이었다. 나는 바로 유튜브에 아이패드를 검색해 관련된 많은 영상들을 보기 시작했다. 관심이 없을 때는 태블릿 pc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나가다 보면 굳이 저걸  사서 쓰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사람들이 올린 동영상을 보고 나니 문제에 대한 정답만 알게   아니라 해설집까지 받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패드병에 걸렸다. 사지 않고는 완치될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아이패드병. 정말 병에 걸린 것처럼 매일 아이패드 영상만 찾아보는 나를 보면서 에라 모르겠다, 있으면 뭐라도 하겠지 싶어서 질러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빠르다는 쿠팡 덕분에 결제한 지 하루 만에 완치를 했고, 다행히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주 잘 사용하고 있다. 갖고 다니기 귀찮아서라는 이유로 안 보던 책을 전자책 서비스를 통해 다양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출퇴근하면서 보던 에세이에서 용기를 얻어 이렇게 글도 쓰게 되었다. 지금은 에세이 책을 발간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중이지만, 유튜브에 짧은 영상과 함께 글을 업로드하기도 했었다. 이왕 샀으니까 잘 써야지, 소비의 합리화를 찾기 위해 이것저것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500% 만족하고 있다.


살 때까지만 해도 예뻐서- 애플 펜슬로 다이어리를 써보고 싶어서라는 감성적인 이유가 많았는데, 앞뒤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다 보니 이런 결과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모든 경우가 이렇다고는 경험상 말하기 힘들지만. 도전해서 경험해 볼 수 있는 용기를 돈 주고 산 것 같아 좋으면서도, 이렇게 퇴사하기 힘든 이유가 하나 더 생겨버린 것 같은 웃픈 현실이랄까. 열심히 출근을 하면서도 퇴사할 생각은 항상 마음에 품고 산다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다. 열심히 돈을 벌고, 소비를 하면서 돈이 있어야 뭐든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걸 점점 더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돈이 있어야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할 티켓이라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너무 따뜻한 햇살에 이대로 회사를 지나쳐 부산역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고, 사무실 책상에 앉아 끄적여보는 금요일 아침. 언젠가는 출근길에 즉흥적으로 부산역에 가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전 08화 침대 위의 비밀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