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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의별 Oct 12. 2022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장롱이 아니야.

장롱면허 탈출기

 '내 차가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 것은 내 지갑 속에서 9년간 조용히 살아온 운전면허증이 남들에게 장롱 속 면허라 말하고 다니는 주인(=나)을 혹시나 미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나서부터였다. 종종 면허가 있느냐는 질문을 들을 때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장롱면허라 운전을 못한다'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그동안 운전을 안 한 거지, 못하는 게 아니지 않을까'라고도 생각을 했다. 능숙하진 않지만 운전을 할 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무척이나 불안했으면서 말이다. 이런 불안감과 답답함을 몇 년 동안 반복적으로 느끼다 보니 조만간 내 차를 사겠노라 다짐을 했다. 물론 그 조만간이 조만간을 부르다가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말이다.

 사실 차가 꼭 필요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웬만해서는 걸어 다녔고, 급할 때는 택시를 잡아 탔고, 멀리 가고 싶을 때는 버스로 이동했다. 그리고 종종 차를 몰고 다니는 친구들이나 가족들의 차를 얻어 타면 되었다. 다만 대중교통으로 가기 어려운 외곽지역으로 콧바람을 쐬고 싶을 때는 예외였다. 차로 20분이면 갈 곳을 1시간씩 버스를 타고 돌고 돌아서 가는 경우도 그랬다. 하루는 친구와 주말에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한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테마공원에 버스를 타고 다녀온 적이 있다. 물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가장 강력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버스도 없고 택시도 잡히지 않는 길거리에서 한참을 벌벌 떨며 발만 동동 구르던 순간이다. 아주 추운 날은 아니었지만, 제주도 바람이 워낙 칼바람일 때가 많으니까. 게다가 집에 못 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에 체온이 낮아져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 당시에 콜택시도, 카카오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지나가는 택시도 없었다. 미친 척 히치하이킹을 해봤지만 아무도 선뜻 차를 세우진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중에 친구와 나는 테마파크에 들어가는 대형택시를 발견했고, 입구 앞에서 그 택시가 다시 돌아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 택시를 잡고 큰 길가의 버스 정류장에 내릴 수 있었다. 집까지 가기에는 택시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가까운 정류장에서 버스로 환승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훗날 친구와 나는 만약 그때 우리가 직접 차를 운전하고 갔더라면 아무 어려움이 없었을 거라며 그날을 추억했다. 그러면서 우스갯소리로 '운전도 못하면서 면허를 갱신하는 날이 오겠구나.'하고 깔깔댔다. 정확히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인데 말이다. 그때부터 이제는 내가 진정 운전을 해야 하겠구나 싶었고, 나보다 더 장롱면허 소지자였지만 이제는 안정적으로 차를 타고 다니는 언니의 도움을 받아 운전연습을 시작했다.

 언니와 나는 서로 시간이 맞는 날이 생기면 돌문화공원을 찾아갔다. 돌문화공원은 굉장히 넓어서 주차공간이 많았고, 각 주차구역은 일방통행으로 된 길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행 연습과 주차 연습을 모두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처음에는 가장 넓은 주차구역에서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것만 연습을 했다. 핸들은 꺾지 않고 그저 직선으로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를 밟는 감을 익혔다. 그다음에는 계속 빙글빙글 돌았다. 주차장이 넓어서 연습하기에 아주 좋았다. 아마도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면 운전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을 것이다.

 자신감이 조금 붙은 다음에는  주차구역을 돌며 핸들링을 연습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언니는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면서도 끊임없이 내게 운전의 기술을 알려주느라 눈과 입이 바빴다. 이미 모든 게임의 판  깨본 사람이 이제  게임을  단계씩 클리어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는 모습이랄까. 어느 쪽에서 악당이 튀어나오고, 어디에서 땅이 꺼지고, 언제 총알이 날아오는지를  아는 사람. 그래서 '그럴  있어. 괜찮아.'라고 아주 여유 있게 말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이었다. 언니는 나에게 아주 오랜만에 차를 운전해보는  치고는  잘하는 편이라고 칭찬을 했다.


 "금방 하겠네."


 언니가 내뱉은 이 말은 나에게 무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알고 있을까. 언니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고. 그래서 내가 언니를 김녕까지 데리고 갈 수 있었다고.

 주차장을 몇 바퀴 돌며 운전연습을 하던 나는 용기를 내 그곳에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김녕으로 향했다. 돌문화공원 입구에서 우회전을 하며 도로로 나설 때 얼마나 심장이 쿵쾅댔는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어느 때보다 눈과 귀를 열고 운전을 했다. 물론 조수석에서 든든하게 진두지휘한 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김녕에서 언니의 친구를 만났다. 언니가 언니 친구에게 동생이 운전을 하고 왔다는 말을 할 때 얼마나 큰 희열을 느꼈는지 모른다. 지난 9년간 지갑 속에 갇혀 이름 없이 살아온 운전면허증이 다시 명예로운 훈장이 되어 빛을 내뿜는 것만 같았다.

 이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나는 긴장을 많이 했었는지 극심한 두통으로 약을 먹고 누웠다. 어깨와 뒷목이 뻐근했다. 가족들은 그런 나를 보고 위로는커녕 운전하고 와서 앓아누웠냐며 깔깔댔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날 이후로 내 운전면허증은 장롱 속에서 완전히 떠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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