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았/었더라면
사람 많은 곳에서 넘어졌다.
치마단이 허리춤에 끼인 것을 모르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별일 아니지.
내가 아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후줄근하게 하고 나갔다가 헤어진 남자친구를 길에서 만났다.
낯 부끄러운 일들이지만 지나고 보면 큰 일은 아니지.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이 전혀 없이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남들이 가지지 않은 것을 드러내 뽐내려는 우월의식, 의도와 다르게 맞닥뜨리는 상황에 대한 비이성적 대처, 나만 편하기 위해 혹은 나의 이익을 위해 도모하는 술수는 자신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온다.
'ㅁ'자 5개 동으로 구성 된 아파트 단지의 골목 건너에 5층 짜리 연립주택이 있었다. 그 옥상에 어느 날 캠핑의자 몇 개와 파라솔이 놓였다. 더운 여름날 저녁 그 연립주택의 주민인 듯한 몇 사람이 올라와 맥주 한 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내려갔다.
며칠 후 그들은 커다란 나무 탁자를 갖다 놓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바비큐 그릴에 숯을 피우고 연기를 피우며 동네 파티를 열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날수록 사람이 점점 많아지더니 술 취한 말소리들이 밤하늘을 돌아다녔다.
날이 더 더워지자 그들은 텐트를 치고 아이들을 옥상에 재웠다. 어른들은 매일 고기를 굽고, 메뉴를 추가해 나갔다. 이제 아이들의 소리까지 밤 외출을 했다.
급기야 그들의 옥상에는 대형 풀이 자리를 잡았고, 그늘막 아래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했다. 아이들의 물놀이는 해가 질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의 노는 소리,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온 동네를 축제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만의 축제였다. 그들의 축제는 결국 경찰과 공무원들의 출동으로 막을 내렸다.
아파트 단지의 공명현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음피해를 당했을지 그들은 정말 몰랐을까?
남편과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아가는 그녀들에게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해받는 부분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고, 따라 하고, 자기 것으로 굳혀가는 과정은 순간처럼 빠르다.
그녀들은 최대한 한국사람처럼 살아가기 위해 보고 들은 것을 총 동원하는 것 같았다.
중국에서 온 그녀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키우고 있었다. 큰 아이는 세 살이 되었을 때부터 학습지를 시작했다고 했다. 덕분에 아이는 5살 정도에는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학습지를 늘려 수학, 한자, 영어 학습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펜 드로잉으로 상상도를 그리곤 했는데 얼핏 보기에도 그 재능이 상당해 보였다. 나는 미술학원에 보내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지만 그녀는 피아노학원에 보냈다. 미술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온라인 학습 플랫폼에도 가입하여 매일 학습 내용을 확인했다. 그 아이에게 쉬는 시간은 없는 것 같았다.
엄마가 집에 없으면 아이는 그림을 그렸다. 펜 하나로 계속 그림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라이브 드로잉' 영상을 보여주었다. 아이의 눈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 다른 공부 이야기를 할 때는 구석진 곳에 가서 귀를 막고 서 있었다.
염려가 되었다. 8살은 아직 엄마를 이길 수 없는 나이지만 3학년이나 4학년만 되어도 엄마는 아들을 이길 수 없게 될 것이고, 아이는 예상할 수 없는 반항의 시기에 접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둘째는 형이 하는 모든 것을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자신이 형보다 더 잘하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녀는 큰 아이 공부해야 한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나갔다.
그런데 놀이터에 가는 그녀의 행색이 좀 의아했다. 옷을 잘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선글라스를 잊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애용하는 것은 트렌치코트였는데 한눈에 명품인 것을 알 수 있는 제품이었다. 다른 곳을 가는가 했지만 그녀의 집에서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디서 보았겠지, 아니면 어디서 들었겠지.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과 속 사정은 좀 다른 것 같았는데, 어디에서 누군가로부터 그런 걸 배웠을까 의아했지만 내 생각을 전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한국사람이었고, 인생관과 교육관에 관한 문제는 이제 스스로, 남편과 상의하여 결정해 가야 할 시기가 되었다.
아이의 재능이 두고두고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내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앞으로 다가올 긴 시간 부모가 바라는 교육의 장벽을 넘다가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세계에 놓이기를 기대해 본다.
부끄러운 일, 후회되는 일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다는 맹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아는 것, 후회를 경험하는 것은 우리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안내한다.
-았/었더라면 : 동사, 형용사, '이다, 아니다'와 함께 과거의 일에 대한 사실과 반대로 가정하면서 과거 일에 대한 후회나 안타까움 등을 나타낼 때
-았더라면 : 어간의 모음이 'ㅏ, ㅗ'일 때
-었더라면 : 어간의 모음이 'ㅏ, ㅗ'가 아닐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