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범한 이혼가정, 네 번째 이야기
중2병을 앓으면서 나의 고민은 더 이상 부모님의 이혼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과 숨기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이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따지고 보면 피해를 본 것뿐인데 왜 내 잘못만 같은지.. 마음속 화가 잔뜩 난 채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대부분 학교는 그 화를 건강하게 표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했지만, 아닌 경우도 딱 한 번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입에 욕을 달고 사는 40대 후반 즘의 남자 선생님이었다. 교사가 되기 전에 깡패였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을 만큼 거친 비주얼의 아저씨 선생님. 사회 과목 선생님이었는데 수업 중 욕을 하기도 했지만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으로 아이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
고등학교 진학 서류 작성을 위해 부모님 도장을 가져오라는 날에 내가 엄마 이름과 다른 도장을 들고 갔다. 교사 외에 다른 사회생활 경험이 많았다는 선생님은 뭔가 이미 눈치챈 듯했다. 걸걸한 목소리로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얌마, 교무실로 잠깐 와 봐.
그리고는 엄마 도장을 가져오기 어려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무거운 공기는 아니었다. 선생님이 별일 아닌 듯 툭툭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잘 알았다면서, 가서 공부하라면서 한마디를 더했다.
“얌마. 어깨 펴고 다녀라.”
어째서인지 그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 그깟 부모님 도장이건 뭐건, 어깨 펴고 살자. 선생님은 구구절절 긴 말을 보태지 않았고 난 그게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현실은 모두가 그 선생님처럼 쿨할 순 없었다. 바로 그다음 해인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대학 졸업 후 처음 임용된 20대 중반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리고 조용조용 내성적이었던, 흰 피부에 큰 안경을 꼈던 선생님.
모의고사를 치르고 학급 한 명씩 진학상담을 하는 날이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학급 번호 순서대로 차례가 되면 교무실로 가서 한 명씩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대화는 자연스레 부모님 주제로 넘어갔던 것 같다. 선생님은 당연히 어머니를 주양육자로 가정한 질문들을 계속했다. 그날은 어쩐지 말을 돌리거나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저희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저는 엄마랑 같이 안 살아요.”
교사 부임 첫해, 이런 말은 처음 들어 보신 게 분명했다. 선생님은 안절부절못한 채, “어.. 음..”을 반복하며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고르고 계셨다. 들으면 안 되는 것을 들어버린 것처럼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덩달아 내가 더 머쓱해졌다. 몇 마디 허공에 둥둥 떠가는 말이 이어졌고 어색하게 상담은 종료되었다.
마치 내가 큰 폭탄을 투하한 것 같은 표정. 그 이후 담임선생님께는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때의 선생님보다 몇 살이나 더 나이가 많아져버렸다. 그때는 그 선생님이 밉기도 하고 많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모두에게 처음은 어려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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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생님을 떠올리며 다시금 드는 생각이다. 학교는 학생을 지지하고 포용해야 한다. 가정의 형태가 어떻든 문제없다고, 어깨 피고 다니라고, 당당하게 살라고, 학생이 비뚤어진 마음에 귀를 막아도 말해주어야 한다. 그때 그 선생님도 이제는 서투르지 않으시겠지, 혼자 외로워하거나 무안해하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