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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h on Oct 27. 2022

나는 할머니의 영원한 똥강아지

지극히 평범한 이혼가정, 일곱 번째 이야기

부모님의 이혼 이후 나는 할머니와 살았다. 충청도가 고향이고 소녀 같은 성정을 지닌 우리 할머니는, 기력이 없어질 나이에 한참 고집 센 사춘기 손녀 둘을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교복을 작게 입는 게 유행이었다. 하복 상의의 맨 아래 단추 밑단을 몇 센티 잘랐는지, 어느 세탁소 아저씨가 원하는 만큼 잘라주는지, 어떻게 하면 선생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지가 반 아이들 사이 뜨거운 이슈였다. 지금의 나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당시 내 눈에도 그 작은 교복이 예뻐 보였는지 교복을 작게 입고 싶었다. 세탁소에 가서 과감히 밑단을 잘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매일 내 옷을 빨아주던 할머니에게 반토막이 되어버린 교복을 들켰다.

 

 

할머니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평소에도 말 안 듣는 똥강아지 같은 게 옷도 강아지 옷을 입는다고 혀를 끌끌 찼다. 여자는 배가 따뜻해야 하는데, 이리 짧은 걸 입어서 어떡하냐고 많이도 혼났다. 이제 여름에도 배가 따뜻한 걸 좋아하게 된 나는 내가 할머니의 강아지였다는 사실과 할머니가 없다는 사실에 조금 서글퍼진다. 오늘 배가 싸르르 차다고 엄살을 부리고 싶어 진다.

 


 

할머니는 성정이 곱고 따뜻한 분이었다. 반면에 나는 할머니에게 고집도 잔뜩 부리고 우악스럽게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할머니가 마트에서 생생우동을 사 오셔서 끓여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라면과는 조금 다른 조리법이었는데, 잘 모르기도 하고 제대로 알아보기도 귀찮았던 못된 중학생은 대충 되는대로 끓여드렸다. 당연히 맛이 없었을 테지만 할머니는 뭐라 혼내지도 않고 맛있게 드셨다.


또 십 년 정도 할머니와 살면서도 주말에는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는 우리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살았는데, 나는 거의 매주 토요일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일요일에 자고 오곤 했다. 엄마에게 가서 자고 오려면 할머니에게 말을 해야 했는데, 할머니는 그러라고는 했지만 반기지는 않았다.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어른들만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묘하게 내가 할머니를 저버리고 엄마를 택한다는 죄책감도 들었다. 나는 할머니를 많이 사랑했지만 나의 혼란스러움과 힘듦을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할머니라서 나를 받아주었다. 엄마였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할머니라서 내게 항상 미안하다 했고 많이 먹으라 했고 아프면 흰 죽을 끓여주고 밤새 손발을 주물러줬다.




오래 병상에 누워있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달이 동그랗고 꽉 찬 추석 즈음이었는데 나는 보름달이 뜬 날마다 할머니가 생각나고 차오르는 눈물에 보름달이 흐려지지 않도록 고개를 젖힌다.


내가 외국생활을 할 때 언니를 통해 할머니가 병상에서 잘 지내냐고 보고 싶다고 말하는 동영상을 받았다. 지금도 내 휴대폰에 있지만 차마 나는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할머니에게 못했던 어린 내가 미워서, 어리다고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아서, 부끄러워서, 후회돼서, 마주하기가 힘들다.


언젠가 내가 하늘에서 할머니를 만나게 되면, 할머니가 예쁘다는 대로 넉넉한 교복을 입고 맛있는 우동을 끓여 같이 먹고 싶다.


말썽쟁이 막내 손녀딸이 우악스럽게 행동해도 사랑으로 포용해준, 당신의 노고와 마음고생을 하나도 몰라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가 부디 내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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