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범한 이혼가정, 아홉 번째 이야기
나에게는 네 살 터울의 언니가 있다. 지금도 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자매가 최고의 자녀 조합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오빠나 남동생, 여동생을 가져보지 않은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라 객관성은 없겠지만 그 정도로 나는 언니가 있어서 행복했고 다행이라고 굳게 생각한다.
엄마 아빠가 이혼했을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언니는 중학생이었다. 언니는 아무 일이 없어도 혼란스러울 사춘기의 한 복판에 부모의 이혼을 마주한 것이다. 나보다 힘들었을 것이고 나보다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힘듦을 묵묵히 견디고 나의 어리광을 다 받아준 언니가 고맙기만 하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 학교에서 부모 신상에 대한 가정통신문을 써오라는데 엄마 것은 뭐라고 적느냐든가, 학교에서 엄마를 오라고 하는데 아빠에겐 뭐라고 말하냐든가,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랑 소통이 잘 안 된다든가 하는 사소하고도 큰 고민을 언니와 머리를 맞대고 나누었다. 해답이야 어찌 됐든 나에게 언니는 최전방에서 나를 맞아주고 때로는 꾸짖는 내 편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나가야 하는지 학교도 학원도 알려주지 않는 '이혼가정의 자녀'로서의 전쟁에서, 언니와 나는 둘 없는 전우였다. 나와 똑같은 입장의 사람이 한 명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외롭지 않았다. 헤어진 엄마와 아빠가 밉기도 했지만 언니와 끈끈해지게 해 주어 고맙기도 했다. 오히려 미움이 사라진 지금은 고마움만 남아있는 셈이다. 내게 가장 든든하고 절대적인 언덕인 언니가 있기에, 오히려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친구관계에 덜 집착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나의 전우의 결혼식날, 엄마와 아빠가 10여 년만에 만나게 됐다.
한국사회에서 결혼식이란 신랑 신부보다도 그 가족과 하객을 위한 자리라는 의미도 크다. 언니는 결혼 날이 잡힌 이후부터 혼주 자리에 대해 고민했다. 엄마 아빠가 앉아야 하겠지만 10여 년만의 만남을 두 분이서, 그리고 그들의 헤어짐을 아는 다수가 어떻게 견디겠는지. 그런 연유로 "이혼하더라도 애들 결혼은 시키고 하지"라는 말이 사회에 공공연한 것인가 실감 나기도 했다.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걱정이자 긴장인 요소를 한 가지 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나에게 한 가지 임무를 주었다. 아빠와 엄마가 잘 만나서, 같이 잘 앉아있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써달라는 이야기. 내가 나서서 둘을 인사시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저 엄마 아빠의 재회를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없을 신부에게는 힘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정장과 한복 차림으로 이혼 10여 년 만에 엄마 아빠가 마주쳤다. 나는 두 분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다. 아빠는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마 "큰 딸의 결혼까지 키우느라 고생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엄마는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작은 끄덕임으로 응답했다.
두 분은 함께 얼마나 많은 결혼식을 다녔을까? 나와 언니가 태어나기 전부터 태어난 다음까지 숱하게 많은 지인의 결혼식을 함께 다니며 축복했을 것이다.
이제는 한 세월을 건너 미소를 띠며 큰 딸의 결혼식에서 만났다. 나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잘, 가볍지 않지만 평온히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세월은 그렇게, 질리도록 다사다난한 일들도 옅은 미소로 희석시켜버리는 것인가 하고, 수긍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옅어진다. 미움의 감정도 사랑의 감정도. 누가 잘못했고 잘했고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완벽히 아물지 못한 상처와 애써 괜찮은 듯 지어 보이는 미소만이 남는다.
그러나 슬프게도, 세상에 완벽히 괜찮아지는 것은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깨끗이 지워지는 문신이 없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에 작은 생채기 하나 남지 않도록, 나중에 지을 어렴풋한 미소 대신 지금 예쁜 웃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지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