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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디스 홍 Jun 22. 2023

시를 잊은 그대에게

AI도 시를 쓰는 너무나 스마트한 세상과 비교되게 열심히 시를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 시험에 나오는 교과서 속 시가 아니라 종종 편지에 베껴 쓰던 고전적인  시들 말이다. 그때는 그런 일이 아주 흔했고 아직까지도 내 입술이 기억하고 되뇌는 몇 개의 시중 나를 시의 세계로 이끌어준 첫 번째 시가 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연합고사를 앞두고 문제집에 얼굴을 파묻고 시들어가던 어느 날 내 짝꿍 미경이는 등교하자마자 나에게 은밀히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수취인이 미경이가 아닌 미경이네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어떤 여자 앞으로 온 편지였다. 안타깝게도 그 여자는 편지가 도착하기 하루 전 남편이라는 사람과 함께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미경이네 문간방에는 갓 스물을 지난 듯 목련처럼 환한 얼굴과 새침한 눈빛의 여자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여리한 외모 탓인지 자주 애인 같은 청년이 찾아와 서성대고 여러 번 편지가 오곤 했는데 갑자기 남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여자와 함께 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녀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남편과 다투고 집을 나와 혼자 지내다 어떤 청년으로부터 구애를 받고 있었다. 그 청년은 그녀가 유부녀였던 것도 이미 떠난 것도 모른 체 편지를 계속 보내왔고 청년의 편지는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미경이는 주인도 없이 쌓여만 가는 편지를 보며 너무 궁금해서 딱 하나만 보기로 하고 혼자서는 용기가 안나 짝꿍인 나와 함께 보려고 편지를 가져왔고 우리는 눈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쳐보았다. 편지에는 애틋한 사랑고백과 이별을 예감한 듯 슬픈 시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고 청년의 사진도 동봉되어 있었다. 우리는 잘생긴 대학생 오빠의 사진을 보며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 남의 연애편지라니... 아직 연애 감정을 모르던 우리에게 그 일은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질 만큼 충격이었다.

그렇게 남의 편지를 훔쳐보고 읽고 또 읽고 몽땅 외워버린 시가 바로 조지훈의 ‘사모‘이다.


사모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림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이미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아! 사모는 꼭 그 청년의 고백 같아서 조용히 읊어주는 목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렸다. 그 후로 나는 많은 연애 시를 읽었고 알 수 없는 아련함으로 질풍의 시간을 지나왔다. 그리고 가끔 그날과 같은 파동과 숨 막힘을 기대하며 시를 낭송하지만 더 이상 그런 일은 없다.

*표지그림은 수채화 교실 세 번째 수업 때 그린 그림으로 '에바 엘머슨'작가를 따라 그려보았습니다.

*두 번째 그림은 노을이 지는 도시 풍경 어반 스케치입니다.


*비밀을 공유하며 함께 두근거렸던 짝꿍 미경이가 넘 보고 싶다~~ '에바 엘머슨' 작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다 보니 미경이 얼굴과 오버랩 된다. 그림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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