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소생하고 생장하는 봄이 아니라 시들고 떨어지는 그리하여 쉼을 준비하는 가을을 계절의 처음으로, 너무 가벼워 잡히지 않는 것들을 눈으로 잡아 마음에 담아두는 이야기 <연남천풀다발>이다.
처음 이 그림책을 만났을 때 술렁거리는 나의 마음은 한 마디로 ‘심쿵‘이었다.
'와우!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과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읽고 다시 읽어도, 보고 또 보아도 버릴 것 하나 없어 애장 하고 싶은 마음을 돈을 주고 결제했다.
책 욕심이 많아 덜컥 덜컥 책을 사다 보니 책장 한편 나만의 ‘애장 컬렉션’에 더 이상 끼워 넣을 공간이 없음에도 비싼 커피 몇 잔 대신 기꺼이 또 책을 사고 말았다.
작가 전소영 님은 실제 서울 연남동에 살면서 매일같이 홍재천 산책을 하며 본 풀들을 그리고, 풀들의 생각을 쓰고 동네 이름을 따서 '연남천‘이라고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사실 나도 집 근처의 천변을 우리 강아지와 자주
산책한다.
산책은 나의 삶의 중요한 피로회복제이다.
걷다가 보는 하늘과 나무와 새들은 언제나 나에게 위로와 평안을 준다.
길에서 만난 작은 새와 풀들과 벌레의 이름이 사람들의 시끄러운 이야기들보다 훨씬 궁금하다.
굳이 산책 예찬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무심히 밟고 지나치는 작은 풀들을 허리 굽혀 자세히 본 사람들은 이 책에서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모두가 질 때 피는 꽃이 있다는 것이
모두에게 저마다의 계절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 문장에서는 박노해 시인의 ‘너의 때가 온다’라는 시가 떠오른다.
경쟁에서 밀려난 나에게 낙담하지도 조급해하지도 말라고 조용히 속삭인다.
이른 아침에 피는 나팔꽃도 있지만 노을이 물들 때 피는 진홍 분꽃을 보며 나도 인생 후반기에 그윽한 향기를 품는 분꽃처럼 피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본다.당장은 시리고 혹독하지만 지나고 보면 소중한 겨울처럼 나의 겨울은 봄을 잉태한다.
흔한 풀이 주인공인 책은 정말 흔하지 않다.
모두가 꽃을 먼저 볼 때 작가는 풀을 보고 꽃다발이 아닌 풀다발을 주인공으로 세워 책표지 그림으로 선보인다. 독자가 책을 고를 때는 표지 그림과 판형, 제목과 서체 타이포그래피 등이 중요한 시각적 요소로 작용하는데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매우공 들여 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표지의 질감도 코팅지가 아닌 한지로 그림책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한마디로 소장가치가 높다는 말이다.
언제나 푸른 것이라면 할 수 있다는 초록 풀들이 비좁은 돌 틈에서도 쓰레기로 오염된 땅에서도 무성하게 도시의 틈새들을 메워주니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운지 저절로 환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림책을 다 읽고 나면 급하고 사납고 거친 마음들은 스르르 녹아버리고 풀같이 순하게 물과 햇빛만으로도 만족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풀들을 눈여겨보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천천히 혹은 성큼 변해가는
풀들의 생을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한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공연이 끝나면 모든 출연자들이 인사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끝나고 마지막장에는 책에 등장했던 모든 풀들의 얼굴과 이름이 하나하나 호명되어 있다.나처럼 이름 모르는 풀들을 궁금해하는 독자에 대한 배려이다.
어느덧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언제나 똑같은 계절은 없다.
반복되는 일에도 매번 최선을 다한다.
올해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이렇게 풀이야기는 끝나고, 나의 이야기는 시작이다.풀의 계절이 다시 돌아오면 귀 기울여 풀의 노래를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