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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디스 홍 Mar 22. 2023

버찌가 후드득 떨어지면

시인과 요술조약돌

하이쿠는 석줄, 열일곱 음절로 된 짧은 시입니다.

일본에서 생겨난 이 시 형식은 위대한 시인 바쇼가 완성했습니다. 바쇼는 수백 년 전에 태어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시인입니다.


고요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


바쇼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입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며, 극단적인 압축과 여백을 통해 동그라미 지는 물결처럼 오래도록 여운이 느껴집니다.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평생 여행과 은둔자로 살며 자연과 소통했던 바쇼는 언어유희에 가까웠던 하이쿠를 깊이 있는 예술 양식으로 끌어올린 시인입니다. 이런 바쇼의 삶을 동경하며 지은 그림책이 있습니다. 미국작가 팀 마이어스 글, 한국작가 한성옥 그림, 출판사 보림에서 펴낸 <시인과 요술 조약돌>입니다. 종종 이렇게 국적이 다른 작가들의 조합으로 작품이 나오기도 합니다.


일본과는 정치 외교적으로 민감한 관계에 놓여있고, 개인적으로도 미운감정이 앞서지만 그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보면 하이쿠는 참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야기와 그림이 버찌가 막 떨어질 때쯤 벚나무 아래 풍경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뽀얗게 피는 벚꽃도 예쁘지만 꽃이 진 자리마다 맺히는 탐스럽고 까만  버찌를 좋아합니다. 길에 후드득 떨어져 꾸우욱  검은 발도장을 찍는 버찌를 보면 너무 아깝고, 나무에 달린 버찌를 보면 왜 똑똑 따서 먹고 싶을까요?

시인이 사는 후카 강 근처 자기 땅에는 커다란 벚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버찌가 열리면 그곳에 사는 여우들과 버찌를 나눠 먹기로 했는데 욕심 많은 여우 한 마리가 사람으로 둔갑해 강가에서 주운 조약돌을 금돈으로 만들어 시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가난한 시인에게 버찌를 여우들에게 모두 넘길 것을 계약하고 가짜 금돈을 줍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 가짜 금돈이 다시 조약돌로 변한 것을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조약돌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시를 짓습니다. 이 모습을 몰래 본 여우는 잘못을 뉘우치고 시인에게 용서를 빌며 진짜 금돈을 지불하려고 하지만 시인은 거절합니다.


돌은 가난을

아랑곳 않고 강만

사랑 하누나

조약돌이 이토록 강을 사랑하는지 그렇게 신비로운 무늬를 지니고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광고 카피 같기도 한 하이쿠는 오히려 바쇼가 살았던 17세기보다 셀 수 없는 정보들과 출판물로 넘쳐나는 현시대에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직관적인 깨달음을 주고 깊은 사유와 물음을 던집니다.


그림책 동아리모임 선생님 중 조약돌에 손뜨개 한 옷을 입혀서 책을 읽을 때 누름돌로 쓰시는 분이 있습니다. 작은 조약돌의 아름다움과 쓸모를 먼저 발견하신 장 선생님은 바쇼처럼 멋진 시인이십니다.

좋은 시는 돈보다 더 값지다네. 그리고 훨씬 오래가지.”

시인의 말은 나직하지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로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쓰고 부자가 되길 권하는 세상에서 바쇼와 조약돌 같이 안빈낙도를 실행하며 돈보다 시를 선택할 수 있을까요? 시보다 돈을 사랑하는 어리석은 여우 같은 나는 시를 쓰며 시인을 꿈꿉니다.


바람이 일렁거릴 때마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 목련, 그리고 벚꽃이 줄지어 피는 계절입니다. 봄은 언제나 새롭고 감격스럽고 한 번도 실증 난 적 없습니다. 저마다의 고운 빛으로 피어난 꽃들이 또 속절없이 져버리면 마음이 슬퍼지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꽃보다 더 싱그러운 이파리들과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는 날이 곧 옵니다.  


길가 벗 나무 버찌를 보며 남편은 매연에 중금속 덩어리라고 먹으면 안 돼!라고 하겠지만 나는 또 키다리 남편에게 버찌를 따달라고 조르겠지요, 하나만 먹으라는 남편의 말을 못 들은 척 한웅 큼 먹고 입술이 파랗게 물들겠지요.


시고 단 버찌를 먹으며

발에 밟히는

너의 운명을 서러워한다.


아이쿠! 열일곱 음절수를 맞추기 어렵네요. 저의 하이쿠는 실패입니다.


*이 책은 먼저 나온 <시인과 여우>와 연결해서 읽으시면 하이쿠의 감동을 더욱 느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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