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시간을 섬세하고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그림책은 처음이었습니다. 첫 문장을 읽을 때부터 보라색 안개를 뿌려 놓은 듯 몽환적 분위기로 단번에 마음을 빼앗은 그림책 <파란 시간을 아세요?/ Anne Herbauts 글, 그림/ 베틀북>를 소개합니다.
안 에르보는 1975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브뤼셀 왕립 미술 학교에서 일러스트를 전공했습니다. 1997년 어린이책 <보아뱀> 출간을 시작으로 <달님은 밤에 무얼 할까요?>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예술상을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자연의 현상을 사려 깊은 관찰력으로 채집하여 독특한 상상력으로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책을 만드는 작가입니다.
작가 안 에르보가 말하는 파란 시간은 새벽일까요? 초저녁일까요? 독자에 따라 새벽으로 느끼시는 분도 있지만 파란 시간은 초저녁입니다. 낮이 긴 여름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을이 소리도 없이 물들고 푸르스름한 땅거미가 내리면 바다처럼 깊고 파란 하늘에 초저녁달이 빙글거리는 시간이지요.
파란 시간의 머리는 한낮의 빛으로 가득하고 심장은 한밤의 어둠으로 물들어있으며 높은 장대발을 신고 한 손에는 작은 책을 들고 머리엔 골무를 쓴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파란 시간은 태양왕과 밤의 여왕이 다투고 있을 때 낮과 밤사이로 슬쩍 끼어들었습니다. 해가 저문 뒤 밤이 오기 전 그 짧은 시간 사이로요. 나머지시간에는 낡은 가로등 기둥 속에 숨어 있지요. 그러다 새들이 알려준 아름다운 새벽 공주를 찾아 해 뜨는 저 먼 곳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밤마다 까만 새로 변해 새벽 공주를 보러 정반대의 시간으로 날아갑니다.
파란 시간은 첫눈에 새벽 공주를 사랑하게 되지만 멀리서 바라만 볼뿐 끝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모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반은 고백하지 못한 짝사랑이고 누구나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접어 놓은 마음이 있지요. 그래서파란 시간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보다 안타깝고 애틋합니다. 이런 신비로운 상상으로 가득한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벨기에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무척 궁금합니다. 자연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을 잉태하는 모태이기도 하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파란 시간은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고 새들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파란 새벽입니다. 새벽에 잘 일어나지는 못하지만 어쩌다 일찍 눈이 떠진 날에는 창문을 열고 고요하고 인적 없는 거리 풍경을 봅니다. 멀리서 희미하게 종소리가 울리고 박하 냄새나는 차가운 바람에 코끝이 찡하고 누군가 쓱쓱 마당을 쓰는 소리가 나면 환한 아침이 옵니다.나는 차가운 아침 공기의 첫 숨결과 모든 소음이 잠들어 있는 고요한 파란 시간을 하루 중 가장 좋아합니다
그리고 나의 추억 속 파란 시간은 노는 게 일이었던 어린 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하늘이 청보라 빛으로 물들어도 친구들과 ‘다방구’나‘술래잡기’를 하고 있으면 엄마가 밥 먹으라고 나를부르는 호명이 울리던 시간입니다. 골목에 불이 하나 둘 켜지면 이 집 저 집에서 두부를 넣은 찌개가 보글거리고 연탄불에 구운 고등어 냄새가 저녁 바람에 묻어오던 시간, 그 아늑하고 약간은 쓸쓸하던 풍경 속으로 파란 시간처럼 새가 되어 정말이지 꼭 한번 날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