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병기, 나만의 실무매뉴얼
이제 막 5개월이 넘은 초등학교 신규 삼석 연이에게 여유시간이 있을까 싶다. 말 그대로 여유라는 게 없다. 그게 5개월 간 견디기 힘든 것 중에 하나였다. 그저 매일 같이 마감이 임박한 작가들이 편집자에게 쪼임을 당하거나 출품 마감일에 완성해서 부랴부랴 공모전에 내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가는 장면 속에서 연이는 매일 같이 근무하고 또 근무했다.
처음이니까 새로운 게 많고 배울 것은 더 많고 모르는 사람 속에서 뭔가를 한다는 부담감에 절어있었다. 아주 푹. 배추도 아닌데 연이는 푹 절여진 배추김치처럼 기운이 없고 바스락바스락 불을 붙이면 홀라당 금방이라도 타버릴 것 같은 얇디얇은 바싹 마른 종이 같았다. 두 개의 상반된 감정상태는 아이러니하게 공존해 있었다.
한 번의 마음의 폭풍우가 불고 비바람을 맞은 땅은 다시 새싹을 틔울 힘을 가졌는지 배추김치를 맛있게 먹으려면 절여야 제격이고 바스락바스락 걸릴 만큼 얇디얇은 습자지 같은 마음이어야 보고 배우고 익히는 데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는 법이다.
연이에게는 하루 중 어떤 시간이 가장 그나마 여유시간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퇴근시간이 4시 30분이라 실장님은 4시 이후에는 결재를 되도록 올리지 말라고 했다. 결재를 올리는 사람도 결재를 하는 사람도 여유가 있어야 틀린 부분도 보이고 바로 잡을 부분도 보이는 법이라 했다.
그런 연유로 4시부터 30분간은 나름의 여유가 생겼다. 이것저것 출력해서 보느라 이면지가 많이 생겼고 그 이면지에 4시 이전에 실무매뉴얼을 빠르게 휘갈겨 쓴 글자들을 보며 첨가할 단어나 문장을 넣었다. 거기에는 무엇을 고민을 했는지를 넣어 다음에 똑같은 고민을 하지 않게 했다. 약간 오답노트라고 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실무매뉴얼이 작성된 일을 할 때면 그것을 펴고 다시 일을 하면서 추가될 부분이 있거나 첨언을 할 게 있으면 검은색으로 두 번째 중요한 것과 그 일에 대한 생각을 기록할 때는 파란색, 아주 중요한 사항이나 주의사항은 빨간색으로 글자색을 달리하여 그 일이 벌어지면 바로 막힘없이 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이는 조금 더 여유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름의 고안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작성한 실무매뉴얼 이면지를 챙겨 집에 가서 컴퓨터로 작성하면서 기억을 재생하는 복기 작업을 병행했다.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재미, 늘어나는 재미. 돈 불리는 재미가 들려야 하는데 실무매뉴얼 파일이 늘어나는 재미를 보고 있으니 참 묘했다. 연이는 나름 만들어 출력을 해서 볼 때면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뭐랄까? 연이만의 무기가 생긴 느낌, 그렇다. 살벌한 이곳 생태계에서 연이를 지켜줄 최종병기가 생겼다.
연이는 5년 후 실무매뉴얼의 개수가 276개가 될지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