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크러스트, 토마토소스, 치즈, 엄청난 사이즈
뉴욕에는 미술관들이 참 많다.
현대 미술 작품들을 볼 수 있는 모마 (MoMA), 서구권 나라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라는 메트로폴리탄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동시대/현대/인상주의/후기 인상주의 작품들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구겐하임(Guggenheim), 그 밖에 휘트니(Whitney) 미술관까지!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전시회들이 많이 몰려있어 전문 예술가들과 '영감'을 받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최고의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이 중 규모와 작품수에 있어서 가장 압도적인 미술관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인데, 최소 3일은 투자해야 그나마 제대로 볼 수 있다나.
암튼, 나는 예술 작품에서는 크게 '영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가끔 한국에서 뉴욕으로 놀러 오는 친구들을 위해 관광객처럼 며칠을 함께 보내다 보면, 혼자서는 느끼지 못했을 뜻밖의 좋은 경험들을 따라하게 될 수 있어 좋다.
이번에 온 친구는 한국에서 브랜드를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것들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의 색깔대로 표현할 줄 아는 꽤나 멋진 이 친구는, 짧은 뉴욕 일정 중 그 3일을 소호(soho)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3일간 그 친구와 동행한 사람으로서, 소호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브랜드들이 거의 다 몰려있는 곳, 더 특별하게는 패션 브랜드들의 런웨이라고 감히 말해보고 싶다. 뉴욕 맨해탄의 소호라는 공간은 알려진 브랜드들에게는 기존의 브랜드를 혁신적이게 어필할 수 있고, 막 시작한 브랜드들에게는 자신을 주목해줄 사람들을 찾아내기 좋은 곳일 테니까.
서론이 길었지만,
소호는 '영감'을 위해서든, 그저 다가올 여름옷을 장만하기 위해서든 각자의 여러 이유들로 늘 붐빌 수밖에 없는 곳이다. 오전부터 시작된 소호 스토어 탐구에 흠뻑 빠져 다음 행선지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려던 중, 다행히도 반갑게 울리는 배꼽시계 덕분에 우리는 늦은 점심 한 끼를 가까스로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스토어 탐방은 친구의 리드였다면, 식당은 '좀 잘 아는' 내가 리드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 있게 깃발이 빽빽히 꽂혀있는 구글 맵을 펼쳐 보이며 걸어서 5분 거리인 맛집 하나를 선보였다.
"오늘은 뉴욕의 피자를 먹어보자"
인기 있는 레스토랑에 예약 없이 들어갔으니 바(bar) 테이블 아니면, 야외에 마련된 좌석에 앉을 수밖에.
좁은 바 테이블을 선택은 고사했기에, 거리에 은은하게(?) 퍼지는 위드(weed)와 쓰레기 냄새를 각오해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피자는 한국에서 온 친구에게 꼭 먹여주고 싶었다.
뉴욕 피자라고 하면 나름의 특징은 있다.
도우는 아주 얇고 바삭한 식감이며, 간단하게 토마토소스와 치즈만 올려 화덕에 구워낸다 (다른 토핑을 얹더라도 무거워 흘러내리지 않아야 한다).
특히 사이즈는 한국 피자의 '패밀리 사이즈' 정도로 커서, 먹을 때는 반으로 접어 먹어야 입 양 옆에 소스를 묻히지 않고 먹을 수 있다. 우리가 방문한 루비로사(Rubirosa)는 앉아 먹는 자리가 마련된 식당이지만, 한 조각 단위로 테이크 아웃으로 파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간단한 구성이어도 분명히 '평범'과 '최고'를 가르는 기준은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우선 '바삭한 크러스트를 유지하는가'가 제1의 평가 항목이 된다.
피자의 중앙 부분의 크러스트가 눅눅해지면, 소스의 양 조절과 도우의 '적절히 얇은' 두께 조절과 오븐 온도 조절의 실패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바로 '맛의 밸런스'인데 도우, 토마토소스, 치즈의 맛이 얼마나 균형을 맞추고, 얼마나 임팩트를 줄 수 있느냐가 다음 방문을 결정짓게 된다. 특히 토마토소스는 맛에 있어서 핵심적인 존재로 적절하게 익혀져 산미가 기분 좋게 적당히 남아있어 부드러운 치즈와 바삭한 도우와 딱 맞아떨어지는 그 밸런스를 유지하는가가 핵심이다.
물론 맛있으면 '생각 없이 그릇을 비워버리지만', 굳이 해체해서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그런 피자가 루비로사 피자라고 말해본다.
물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일뿐이고, 두 번 다 같은 맛의 피자를 시켜버렸지만, 눈이 번쩍 뜨이며 '오마이갓...'을 외쳤던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 또 돌아왔다.
이번에도 나는 '타이다이'(tie-dye)!
'타이다이'는 어린 시절, 티셔츠를 돌돌 말아 실로 꽁꽁 묶은 뒤, 염색약에 담갔다가 꺼내 알록달록 무늬를 만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금방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미국 사람들은 이런 활동을 꽤 많이 하는 것 같은데 한국에서 오래 산 사람에게는 당연히 생소할 수 있는 말이다.
타이다이 피자에 들어가는 재료도 심플하게 "보드카/토마토소스/모차렐라/페스토" 이렇게 소스와 치즈로만 이루어진다. 보드카소스는 사실 토마토소스와 해비 크림에 보드카를 같이 넣은 이탈리안 아메리칸 스타일의 흔한 토마토 소스의 일종이다. 쉽게 말해 크리미한 로제 소스 같은 맛이다 (익힐 때 날아가 알코올 맛은 나지 않는다). 기본은 이런 보드카 소스, 모차렐라 치즈이고, 페스토 소스로 타이다이의 알록달록함을 표현했다.
8조각으로 잘린 거대한 피자가 우리 테이블을 강타한 순간, 우리는 여덟 번 테이크아웃할 양을 시켜버렸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래! 크기까지 패밀리 사이즈여야 진정한 뉴욕 피자지!"
첫 입은 떨떠름하게 베어 물었지만, 뉴욕 피자에 대한 나름의 평가 기준을 친구에게 설명할 세도 없이 나는 그릇을 깔끔하게 비워버렸다 (세 번 테이크아웃할 양만큼).
절때 눅눅해지지 않은 크러스트와, 깊고 진한 토마토소스가 다른 토핑의 도움 없이 제 역할을 다 해준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뉴욕 피자라고 자신 있게 외친 나의 발언과는 다르게, 루비로사 로고에 당당하게 그려진 이탈리안 마크 때문에 잠깐 살짝 자신감에 힘을 잃었지만, 1900년도 초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 이주민이 뉴욕에 정착해서 만든 피자가 뉴욕 피자의 시초이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당시 미국인들이 피자 한 판을 다 사 먹을 돈이 없었기에 피자의 크기는 키우고, 한 조각씩 저렴하게 팔았던 것이 오늘날의 뉴욕 피자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예전에 즐겨본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어글리 딜리셔스(ugly delicious)'의 '진짜 피자'편에서 '진짜 피자는 무엇일까?'라는 주제로 풀어낸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다. 이탈리아 이주민들이 미국에 처음 정착해서 만든 피자는 그들 고향의 것과 꽤나 유사했겠지만, 다음 바통을 이어받은 오늘날의 "이탈리안 출신 아메리칸" 셰프들은 자신들의 피자를 "이탈리안 (아메리칸) 피자가 아닌 아메리칸 (이탈리안) 피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무엇이 더 진짜냐는 토론 보다는 새로운 피자의 탄생 스토리가 나에게는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소호 상점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돌아다녔던 지난 3일간의 '목적 있는 쇼핑'의 시간과, 커다란 피자를 함께 떼어먹으며 맛있게 나눈 피자 이야기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경험이다.
때로는 마치 관광객처럼, 익숙한 곳을 처음 가본 사람처럼, 적절하고 적당한 시간을 들여서 탐험하는 것도 좋다는 것을, 기분 좋은 피자 세조각과 함께 마무리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날씨 좋은 봄, 나에게 특별한 '영감'을 줄 수 있는 다음 익숙한 곳은 어디일까?
아무리 또 돌아올 맛이라 하더라도 다음에는 18인치 말고 14인치로 시킬게요. 명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