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날씨가 따뜻한 4월 어느 날, 삶에서 다시 여유가 찾아지려는 봄의 후반부.
황량했던 겨울을 지나 여전히 추운 초봄을 또 지나고, 세찬 바람과 따뜻한 햇살이 번갈아가며 인사를 하려는 봄이 어느새 따뜻한 안정기를 접어든 날이었다.
페이퍼와 논문 제출의 바쁜 시기가 폭풍처럼 지나가고 안정적인 따뜻한 봄날과 함께 내 마음도 어느새 준비가 됐다. 아침마다 학교까지 지하철을 타는 대신 걸어가는 편인데, 어제엔가 문득 등굣길에 푸르른 나뭇잎을 바라보며 릴랙스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진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평소처럼 학교가 아닌, 센트럴 파크를 따라 걸어가 보고 싶었다. 푸른 나무와 산책하는 여유로운 사람들이 많은 주말 아침, 팔랑팔랑 귀를 흔들며 뛰어가는 어린 강아지처럼 내 마음도 싱그러워졌다.
여유는 평소 일상에서 템포를 조금 늦추고, 매일의 루틴에서 벗어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분명한 것을 오랜만에 찾아 꺼낼 때 다가오는 것 같다. 물론, 당장 처리할 것이 없어야 하는 전제 조건은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여유를 즐길 만반의 준비로 조깅화와 캡 모자를 바짝 쓰고, 양 귀에 에어 팟을 꽂으며 여유로운 피아노 찬양곡을 들으며 걷고 또 걷기 시작했다.
센트럴 파크는 110번가를 시작으로 59번가까지 길게 뻗어있는 큰 도심 속 공원인데, 나는 98번가를 시작으로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왔다.
90번가를 지나고 80번가를 지날 때쯤 내 발걸음은 한결 더 가벼워졌는데, 그 이유는 이 센트럴파크 중간 반환점 언저리에 내 숨겨둔 행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창한 행복은 아니고, 78번가에는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크룰러 (Cruller)'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사실 '튀긴 도넛'이다 (머쓱).
내가 요리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는 룸메이트 언니와 '뉴욕 맛집 도장 깨기'를 한 적이 있었다. 언니는 한국에서도 아메리칸 음식점을 창업한 경험도 있고, 앞으로도 자신의 외식 브랜드를 계속 만들어 보려는 열정이 강한 사람이라 뉴욕의 창의적이고 신선한 음식들을 최대한 많이 경험하기를 원했다. 그 덕에 나도 언니 따라 이런저런 식당과 베이커리를 들르며 참 많은 음식을 맛보고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스토리'를 사랑하기도 했는데, 다시 말하면, 애정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상상의 나래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카페는 왜 손님 이름을 물어볼 때, 이름에 성씨까지 물어보는 걸까?" "그러게? Genie가 아니라 Genie K. 까지 붙이는 이유가 뭐지?" "예전에 동명이인이 있어서 잘못 음료가 나갔나? 아니면 뭔가 고객을 존중하기 위해서인가?" "그냥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만일을 대비해서겠지?"
혹은, "왜 이 집의 유명한 도넛은 아침시간에만 판매하는 걸까?" "도넛이 맛있으니까 모닝커피도 여기서 사라고? 아니면, 일부러 희소한 것처럼 느끼게 하려고?" 등과 같은 우리들의 상상 스토리 같은 거 말이다.
어찌 됐건, 한 때 언니와 내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 바로 '크룰러'를 파는 'Daily provisions ('일용할 양식'으로 번역될 수 있죠)'이었다. 일단 이름 자체가 너무나 센세이셔널하게 눈길이 끌었고, 한국에서는 셰이크 셱(Shake shack) 창업자로 더 알려져 있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미쉘린 1 스타 Gramercy Tavern와 2 스타 Modern의 오너로 알려진 대니 마이어 (Danny Meyer)의 카페이기 때문에 더 궁금했달까. 그래서 그때 먹고 반했던 것이,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종종 찾게 만든다.
데일리 프로비전에는 브런치 메뉴들과 여러 가지의 빵들을 함께 팔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카페의 시그니처는 '크룰러'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최근에 한국에서 놀러 온 친구도 이곳 도넛을 한번 맛본 뒤로 한국 가서 제일 생각나는 도넛이라고 말했으니, 그리고 인스타 스토리에 올린 뒤 폭발적인 DMs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니 꽤 객관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크룰러(Cruller)는 사실 데일리 프로비전에서 만든 고유명사가 아닌, 미국과 캐나다에서 많이 먹는 꼬인 모양의 튀긴 도넛을 일반적으로 의미한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네덜란드가 그 원조라고 하지만, 거기서 주장하는 원조 도넛은 씹을 때 빵 식감(폭신폭신/식빵 씹는 듯한)이 나는 이스트 도넛인 반면, 현대의 크룰러는 슈 페이스트리 (choux pastry) 도우를 사용해 이스트 없이 계란을 팽창제를 쓴다는 차이가 있다. 슈 페이스트리에 대해 더 쉽게 말하면 이것을 오븐에 구우면 슈크림 빵이 되고, 튀기면 추로스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크룰러는 슈 페이스트리를 튀겼기 때문에 사실 추로스와 식감과 맛이 상당히 유사하지만, 모양이 길쭉한 대신 동그랗고, 도넛 단면에 보통 설탕 글레이즈가 발라져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실 맛없을 수 없는 조합이어도 여러 평범한 크룰러 중에 눈에 띄었다면, 그것은 데일리 프로비전 도우만의 미세한 차이와 글레이즈와의 조합, 튀김 온도의 적절함의 콜라보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것 보다, 데일리 프로비전의 활기찬 바이브와 대니 마이어의 가게라는 것이 한몫했을지도.
무엇이 되었건, 크룰러 하나가 상쾌한 발걸음으로 센트럴 파크의 푸르른 나무만큼이나 나에게 활력을 주었다면, 이건 정말 '귀중한' 일용할 양식이 아닌가 싶다.
주말이어서 더 북적거리는 매장 안. 한 곳은 커피를 만들고, 한 곳은 주문을 받고, 한 곳은 여유롭게 브런치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곳에서 오늘의 먹잇감 크룰러 세 가지를 맞이 한다.
심플하게 '메이플, ' '시나몬 슈가, ' '히비스커스 (Hibiscus)'
세 종류를 다 맛본 사람으로서 역시 '메이플'이 원탑이지!
라떼 한잔과 도넛 하나를 양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또다시 가벼운 발걸음으로 센트럴 파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봄과 함께 찾아온 작은 도넛 하나가 기분 좋은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도넛과 커피를 들고 파크 위로 올라가는 길, 지나가던 미국 여자 두 분이 나에게 묻는다.
여자 1: "여기 근처에 가장 맛있는 베이글 집이 어딜까요?"
나: "혹시 여기 여행 오셨어요?"
여자 1: "네! 맛집을 잘 아실 것 같아서요!"
나: (씨익)
- 내가 '뉴요커'로 보인걸까 아니면 내가 이동네 사는 사람같이 편해 보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