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기 좋은 곳

취미생활

by 엘리

나로부터, 삶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반복되는 일상과 여기서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고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으로 여기는 삶에 대해 지루하고 따분해지다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그 순간 도망치고 싶을 때, 쓸데없이 착실한 나는 그러지도 못한다.


그럴 때 도망가기보다 어딘가로 숨었다가 엉켜있는 마음을 잘 풀어주고 다시 짠 하고 나타나는데 나를 숨겨주는 그곳은 꼭 장소가 아니더라도 그 행위만으로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취미생활이다.


바늘 코 홈에 실을 넣어 쭉 잡아 뺀 다음 끝에 매듭을 묶고 천에 가져다가 첫 코를 꿴다.

일정한 간격으로 바느질을 하고 그 안에 긴 핀셋으로 잔뜩 솜을 넣어준 후 빵빵해진 인형의 팔다리 몸통을 굵은 실로 잘 이어주고 털실을 잘라 만든 머리카락도 글루건으로 붙인 다음 고무줄로 묶어준다.


미리 만들어 둔 옷을 입힌 후 단추로 눈을 만들고 페브릭용 마커와 펜으로 코와 입술을 그린 다음 볼터치까지 마무리하면 예쁜 인형이 완성된다. 손가락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지만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어느새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 비워지고 뿌듯한 성취감이 그 자리를 메운다.


쓰다 남은 천조각을 모아 여러 가지 색 실로 바느질해서 파우치도 만들고 동전지갑, 가방, 북커버를 만들기도 하고 열쇠고리나 담요 등을 만들어 선물해 주기도 한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 손을 움직이고 정신을 집중해서 무언가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들고 나면 그 강렬했던 충동이 잦아들어 있음을 느낀다.


그건 글씨를 쓸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독서를 할 때도 그렇고 편한 운동화 신고 모자 눌러쓰고 동네 한 바퀴 산책하며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돌아오는 길의 발걸음에서도 느껴진다.


상황에 맞게, 때에 따라, 내 기분과 몸의 컨디션을 보고 고를 수 있는 취미들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취미의 사전적 정의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 이라는데 즐거움을 얻는 것까지 닿을 수 있으려면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잘해야 기쁠 것 같고, 지금은 그냥 잡생각을 떨쳐주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게 해주는 쉼터 같은 느낌이다.


몸을 움직이고 정신을 쏟는데도 쉼을 얻을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감정이 요동쳐서 울렁거리거나 폭발할 것 같을 때,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다른 누군가는 달리고 공을 차고 던지고 수영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전거를 타거나 오토바이, 자동차를 꾸며 보기도 할 것이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요리를 하고 물조리개로 식물들에게 물을 주며 말을 건네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일을 가지고 양초나 비누를 만드는 사람도 있겠지. 조물조물 점토를 만져보는 사람도.


그 어떤 것이 되었든 얼마 간이라도 나를 숨 막히는 답답함으로부터 숨통 트이게 해 주고 쉴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취미를 찾았다는 게 행운이라 생각한다. 쇼핑이 취미가 될 수 있게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라는 엉뚱한 생각과 함께 미뤄둔 집 청소를 계획하는 모처럼 소란스럽지 않은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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