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초록

여름

by 엘리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면서 가을로 옷을 갈아입은 계절을 체감하지만 낮 동안에는 아직도 땀이 흐를 정도로 더운 걸 보니 여름이 아주 간 건 아닌 것 같다. 시기에 맞게 가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으나 여름의 눈치가 보여 가을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로 한다.


내 생일은 8월이다. 무더운 여름에 나를 낳았을 엄마의 고생을 몸으로 체험한 나는 이제 내 생일이 마냥 행복하지마는 않다. 학창 시절 내 생일은 늘 방학기간과 겹쳐서 정말 친한 친구들이 아니면 축하받기 힘들었다.


3월부터 열심히 친구들 생일파티에 불려 다니며 여기저기 선물했지만 내 생일이 되면 받은 대로 나를 챙겨주는 반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집이 가깝고 자주 모여 놀던 절친들만이 나를 챙겨줬을 뿐.

그런데도 어렸을 때는 지금과는 다르게 8월을 기다렸고 여름을 기다렸다.


성인이 되고 여름에 불만이 많아졌다. 더 이상 방학을 누릴 수 없는 출근하는 삶을 사는 나에게 가혹한 습하고 더운 날씨, 극성부리는 모기와 초파리, 벌레떼들, 피한다고 해도 새까맣게 그을린 얼룩덜룩 피부.

'이 모든 게 다 여름 탓이야.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거 외에 좋은 게 하나 없어. 역시 봄이나 가을이 최고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마음들로 여름이 찾아오는 6월부터 선물 받는 거 빼고 나이 들어감을 느끼며 속상함을 느끼는 8월의 내 생일 무렵까지 불평을 그득 쌓아놓은 채 여름을 맞이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분명 무더운 날씨 속에 마스크를 쓰고 답답하고 습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는데도 여름이 좋았다. 여름이 되면 봄의 초록과는 달리 무성하고 풍성하게 짙은 초록으로 물드는 풍경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였을까?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살 아래 그 빛을 온몸 가득 쬐며 충만한 무언가를 느꼈을 때부터였을까? 고르는 수박마다 과육이 풍부하고 달아서 한 입 베어 물면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던 그 순간들도 한몫했으리라.


차갑게 밀쳐내지 않고 따뜻한 수온으로 즐거운 놀이를 하게 해 주었던 여름의 바닷가도 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여름의 모습을 다시 찾아서 기뻤다. 무언가를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게 내 정신건강에 득이 된다는 걸 여러 해 살아오면 알게 되었는데 싫던 것이 좋은 것으로 바뀐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우습게 들릴 수 있고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일 테고 누군가는 미쳤다 할지 몰라도 그 해 여름, 그리고 올해 여름 뜨거운 햇살을 내리쬐며 걷던 길에 만났던 수많은 초록들이 나에게 그들의 싱그러운 빛으로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씻겨주었던 경험은 아마 나만 알 것이다. 나에게 방긋 웃으며 내 안부를 묻는 것 같은 기분.


건강에는 안 좋은 차가운 빙수와 아이스크림을 후덥지근한 열기를 핑계 삼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여름.

미적지근한 바람이라도 그 바람에 묻어오는 풀내음과 꽃향기가 좋은 여름.

추워서 몇 겹씩 껴입은 옷보다 훨씬 가벼워진 차림으로 밖을 나설 수 있는 여름.


고마웠어. 내년에 또 만나. 땀에 흠뻑 젖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올려다본 눈부시게 빛나던 초록 여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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