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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Nov 29. 2021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첫사랑을 만난다면(27_소설)

유현이와 함께 이야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말이 잘 통했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내내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집이 보일 때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여름아, 내일 아까 받은 영화 티켓으로 영화 볼래?”

“그래 좋아. 나 내일 알바 마치면 4시야.”


“음, 나 내일 할머니 집에 잠시 다녀와야 되거든. 저녁 먹고 오면 8시쯤 될 것 같은데. 괜찮아? 너무 늦은가?” 그가 예전에 할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주말이면 할머니 댁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8시 괜찮아. 할머니께서 네가 가면 좋아하시겠다. 무슨 영화 볼래?”

“너 좋아하는 로맨틱 코미디 볼까? 내가 예약해 놓을게.”



“좋지. 그럼 내일 8시에 영화관에서 보자.”

“응. 그리고 운동화 신고 다니는 게 어때? 아까 보니까 뒤꿈치 까진 것 같던데.” 티 안 내려 애썼지만, 사실 하루 종일 일하고 걷느라 발이 많이 아팠다. 굽 있는 샌들을 신었더니 발은 퉁퉁 부었고 뒤꿈치는 발갛게 살갗이 벗겨졌다.     



“그래야겠어. 데려다줘서 고마워, 유현아.”

“아냐, 운동하고 싶어서 걸어온 건데 뭐. 집에 가면 어제 벽화마을에서 찍은 사진 보내줘.”

“그래도 고마워. 응, 바로 보내줄게. 조심히 가.”




집에 도착해서 창문으로 내려다보자 유현이가 우리 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방에 불이 켜진 걸 확인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뒷모습을 보자 생각이 깊어졌다.


     


하늘에 뜬 달을 한참 응시하다 그에게 사진을 보내주기 위해서 노트북을 열었다. 길거리 사진기로 찍어서 흐릿했지만, 수줍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와 나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습관적으로 엄지, 검지 손가락으로 사진을 확대하다 아차, 하고 모니터에서 손을 뗐다. 조금은 굳은 듯한 그의 어깨와 표정을 보고 또 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온도가 올라갔다.          



그에게 사진을 보낸 뒤, 검색창을 열어 그가 맛있다고 했던 ‘여름의 피자’를 검색했다. 그가 좋아하는 식당이니, 그 식당의 맛이나 분위기와 비슷한 곳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블로그 후기를 찾아보려 했으나, ‘여름의 피자’는 어떤 사이트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이름을 잘못 안 건가? 분명 여름의 피자였는데. 내 이름과 비슷하다고 했으니 틀림없는데. 여름네 피자, 여름과 피자 등 비슷한 단어를 검색해봤지만 벽화마을 근처에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피자집이 없었다. 그의 취향을 조금 더 알 수 있었는데, 찾지 못해서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일기장을 펼쳐 어제,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 내려갔다.      

BCD카페에서 만난 묘한 여인과 다시 2008년으로 돌아온 감정까지.



아, 그런데 이걸 모두 기록해도 될까? 1년 뒤 이 시대를 사는 내가 돌아왔을 때, 이 일기장을 보면 당황스럽지 않을까? 혹여나 다른 누군가 이 일기장을 본다면?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소멸한다는 마지막 조항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도 미래에서 왔다는 걸 들킬 만한 행동과 말들이 몇 번이나 튀어나갈 뻔했다. 사실 이제 곧 개강이라 친구들을 많이 만날 텐데, 말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물론 미래에서 왔다고 말해도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진 하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아주 간단히 메모만 남겨두기로 했다. 1년 뒤의 나를 위해서.


    

‘2009.8.29.(금) 벽화마을에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이름은 안유현. 약학과 22살. 울고 있던 그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그와 함께 벽화마을 답사를 가고 길거리에 누워 하늘을 봤다.

  

2009.8.30.(토) 유현이와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는 평일 알바, 나는 주말 알바. 그는 나를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언제일까?

…     


그와 있었던 일들을 일기장에 쓰는데, 연극을 볼 때 그가 내 어깨를 감싸 안은 것과 태국 원피스를 입고 있는 내게 예쁘다고 말한 것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난 생에서 이런 기분 좋은 설렘은 유현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 설렘을 다시 한번 느끼니 얼른 그를 잡고 싶었다.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어깨에 기대고 싶었다.



내겐 1년의 시간밖에 없기에,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용기를 내려고 돌아왔으니, 내일 내 마음을 이야기할까?


지금까지 고백을 여러 번 받았지만, 내가 먼저 좋다는 표현을 한 적은 없었기에 고백하는 순간을 생각하니 긴장됐다. 더욱이 나는 그를 10년 넘게 기다렸지만, 그는 나를 만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혹여나 너무 서둘렀다가 어렵게 다시 만난 그를 놓칠까 봐 두려웠다.




그때 지난 인생이 떠올랐다. 2번째 만난 날, 손을 잡자고,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그의 모습이 생생했다. 혹시 그가 내일 고백하지 않을까? 우리 이틀 연속으로 데이트를 했으니까. 그도 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어쩌면 내일, 그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까. 일기를 쓸 때도, 침대에 누워서도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음 날 8시, 그와 만나기로 한 영화관으로 향했다.


‘여름아, 7층 매표소로 오면 돼. 팝콘 사서 기다릴게.’


그의 문자를 보고 좀 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팝콘과 콜라를 들고 나를 기다리는 그가 보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를 보는 나까지 기분 좋아지는 미소였다.     


“많이 기다렸어?”

“아냐, 방금 왔어. 너 무슨 맛 좋아할지 몰라서 기본이랑 캐러멜 반반씩 했는데, 어때?”




“나 캐러멜 맛 좋아해.”

“잘됐다! 난 기본 맛 좋아하는데. 아, 그런데 어제 받은 티켓을 깜빡하고 놓고 왔어. 그 티켓으론 다음에 보자.”




“아 정말? 그래 그러자. 그럼 오늘 야식은 내가 살게.”

“너보고 야식 사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그럼 나야 좋지!” 그는 웃을 때면 ‘흐아’하는 소리를 내며 살짝 눈을 감는데 그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다.








유현이가 영화관 좌석에 앉으며 말했다.

"팝콘은 내가 들고 있을게. 편하게 먹어."

"응. 아, 영화 시작한다!"




영화는 사랑에 서툰 남녀가 만나 서로에게 깊이 빠지는 내용이었다. 두 주인공의 감정 묘사가 디테일해서 금세 빠져들었다. 스크린에 눈을 고정한 채 유현이가 들고 있는 팝콘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팝콘이 잡히지 않아 위치를 잘못 찾았나 싶어 손을 공중에 휘적거렸으나, 손에 닿지 않아서 옆을 바라보았다. 그는 팝콘을 내 반대쪽으로 내민 채 날 보며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 정말!”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그는 귀엽다는 듯이 날 바라보며 캐러멜 맛 팝콘을 하나 쥐어 입에 넣어주었다. 그의 손이 내 입술에 살짝 닿을 때, 너무 놀라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뒤로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빛나는 눈과 내 입술에 닿은 조금은 거친 손이 생각나서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사랑스러운 표정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에게 빨리 고백하고 싶었다.



이런 적극적인 행동을 보면 내가 고백해도 그가 놀라진 않겠지,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어디서 어떻게 고백하면 좋을까 생각하는데 어느새 영화의 끝을 알리는 엔딩 노래가 흘렀다. 벌써 영화가 끝나다니,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여름아, 영화 되게 재밌다! 넌 어땠어? 톰이 점점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 공감됐어.”

“응, 나도 재미있었어. 근데 여주인공이 좀 나쁘지 않았어? 톰한테 상처를 많이 줬잖아. 결국 결혼도 다른 사람이랑 하고.” 전반부에 본 내용을 애써 생각하며 말했다.



“아직 사랑을 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 아닐까? 처음 겪는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없었을 수도 있고. 아직 어리잖아, 우리처럼.”

“그런가. 그런데 사랑하는 것도 배워야 해? 당연한 거잖아.”



“난 사랑도 배우는 거라고 생각해. 우린 다른 것들은 배우기 전에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사랑은 처음부터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처음부터 진실되게 모든 걸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야.” 그가 말했다.



“오, 그렇네. 그러고 보니 나도 사랑을 배운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 그럼 여주인공과 톰을 서로에게 사랑을 배운 거네? 다음 사람을 만나서 제대로 된 사랑을 하게 된 거고.”



“응. 누구나 처음은 서투니까 서로에게 상처를 많이 줬지만, 다음번엔 시행착오를 줄인 거지. 둘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서로의 부족함을 보듬고, 과정이 되어 준거야. 난 그래서 너무 좋았어. 어쩌면, 과정을 알려준 사람이 평생 기억에 남을지도 몰라. 자신의 미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니까.”



그의 말을 들으니 지난 인생의 나와 유현이가 떠올랐다. 서로에게 배움을 주었지만, 과정으로 남아버린 관계.










재정비하고 2주 만에 뵙네요!!!

여름이랑 유현이, 2주 만에 까먹으신 거 아니죠ㅠㅠㅠ!!!

앞으로 더 재밌게 풀어나가 볼게요~~~!!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네이버 블로그, 직접 촬영

매주 월, 목 4시 30분에 업로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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