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불구

시선

by 정주구


런던탑 그림


22살, 만으로 20살, 초가을, 나는 사랑하던 사람의 품 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그 사람의 품은 마치 견고한 성곽 같아서 나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유롭게 슬퍼하고 기뻐하고 좌절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두려워할 수 있었다. 작은 눈물샘에서 나오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형태를 바꾸어 나의 단전에서부터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거슬러 올라와 흐느낌의 형태로 비집고 나왔다. 눈물로는 모자라서 기어코 나의 모든 구멍에서 쏟아져 나왔던, 쏟아져 나와야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지금, 그 순간은 내 안에서 꾸준히 재편집되었고 순간을 이루고 있던 구성요소들이 희미해져 불확실한 현실로 과거에 남아있게 되었다. 성곽의 크기가 어땠는지, 사랑해 마지않았던 사람의 표정은 어땠는지, 대략 몇 시 정도였는지,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정확하게 재연할 수는 없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너무 두려워서 나는 넓은 성곽 구석에 몸만 겨우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를 파 몸을 아주 작게 웅크리고 누워 떨고 있었다. 웅크린 모습은 태초의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무엇을 두려워했나. 멀지 않은 미래에 정신적 불구 상태가 된 나의 모습을 두려워했다. 정신의 감수성, 정신의 돌기를 닳아 없애는 데에 영향을 끼치는 그 무엇보다, 그 무엇을 잘 알고 있지만 그대로 두는 스스로를 무서워했다. 이 시간의 끝에 분명히 있을 정신적 감수성이 사라진 자신. 그것의 매섭도록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 만은 성곽 안에서 피할 수 없어, 스스로 구덩이를 파 몸을 누위는 것이었다. 구덩이를 판 양손의 끝은 손톱이 부러지고 갈라져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 또한 원망의 감정으로 가득 차 검붉은 눈물이 뚝 뚝 흐르고 있었기에 나는 오히려 손 끝의 피를 숨기고 고통을 삭이는 것이다. 구덩이 안에 있어도 시선이 느껴져 눈을 꼭 감아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이윽고 눈을 떴다. 집요한 그 시선은 내 안에 있는 동시에 밖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으며, 어디에서도 피할 수 없고, 어쩌면 사는 동안 계속 함께 할 것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선은 애원했다. 제발 나를 지켜달라고. 지금의 네가 있는 힘을 다해 정신의 돌기가 무뎌지지 않도록 지켜주면 나는 불구가 되지 않을 거라고. 너와 나는 정신의 감수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그것이 마모되어 뭉툭해지는 때에 결국은 끝이 날 거라고.


시선은 결단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용기가 없어 결단을 하염없이 유보하며 구덩이 안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시선은 계속 피눈물을 흘려댔고, 말했고, 경고했다. 그 후로도 애원과 무시, 호통과 유보가 반복되었고 그것은 고리를 이루어 영원한 회기가 되었다.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결국 의미 없음을 뜻한다. 무의미의 고리를 따라 시간이 흐른 뒤, 구덩이 안에 있는 나는 두려움에 익숙해졌다. 구덩이를 나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땐, 시선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었다. 다만, 눈물이 흐른 자리에 붉은 흔적만은 깊게 남아있었고, 시선만은 거두지 않은 채 더 이상 애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완전한 무표정을 지으며 공허한 시선을 보냈다. 너무 공허하여 나를 보는지, 나의 회피한 시간들을 보는지 헷갈릴 뿐이었다.

이 후로 몇 해가 지나는 동안, 고맙게도 성곽만은 여전히 견고하여 같은 빛으로 내 앞을 비추었고 나는 그 안에서 또 끊임없이 슬퍼하고 기뻐하고 좌절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두려워했다. 기쁨과 밝음 만을 아는 천진난만한 공주님으로 그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은, 나는 또다시 그 기억을 끄집어내어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를 마주하였다(이것 또한 불확실한 발견이지만, 불확실함 안에 있는 불확실함은 어쩌면 확실함 일수도 있지 않을까? 어찌 됐건 불확실함, 확실함은 이 기억에서 의미가 없다. 그저 해석과 인지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꾸준히 내부를 밝히는 성곽의 밝음 안에 나의 정신은 기어코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었다는 것과, 그 밖으로는 나의 두려움을 따라온 디멘터와 같은 어둠이 잔인하게 깔려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저 그 변함없는 성곽은, 처음 들어올 때와 같은 불빛 만을 여전히 은은하게 밝혀 두려움이 몰고 오는 시꺼먼 어둠을 본인의 등 뒤에 숨겨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 기억의 끝에서 또한 더 이상 구덩이가 아닌 성곽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나의 두 발로 지탱하여 서 있는 성곽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손으로 쓰다듬었다. 냄새를 맡아보았다. 온도를 느껴보았다. 그것은 분명 ‘확실하게’ 존재했다. 눈을 감고 그 ‘확실한’ 존재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 울타리 너머에 새까만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의 등 뒤에 숨기고 더 많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한 것에 대해, 또 기꺼이 한 공간을 내어준 것에 대해.



내가 시선을 피해 숨었던 곳이 결국 나를 살게 했다는 것을 안 지금,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살아낼 것이고, 나의 정신 또한 ‘완전히’ 불구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할 것임을.


아직도 실존하는 성곽에 서서, 감정의 돌기가 닳아져 ‘거의’ 정신 불구가 된 시선과 그 너머에 여전히 실존하는 먹구름을 찬찬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