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의 DNA는 따로 있다.

칼국수가 있는 소주마을

by 힐링아지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쌀쌀한 밤, 어묵탕에 소주가 생각날 것 같은데...


"아줌마 소주 두 병하고 따끈한 어묵탕에 '아무거나‘ 한 상해서 갖다 주세요"


배달 주문이 들어왔다.

‘아무거나’는 1만 원이고 '내 맘대로'는 1만 5천 원인 술안주 한 상이다.(요즘의 이모카세와 비슷하다. 매일 새벽 시장에서 사 온 식재료로 그날 안주를 만들었다) 소주 두 병과 아무거나 한 상을 머리에 이고 어두컴컴한 인쇄 골목으로 배달을 했다.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쟁반은 앞에 두시면 내일 찾아가겠습니다. 수고하세요”


2층 계단을 내려와서 현관문을 밀고 나오다가...


"아악~!!"


외등도 없는 건물 입구를 나서는데 뒤가 터진 슬리퍼를 신고 질질 끌던 발뒤꿈치를 무엇인가가 찍은 것이다. 건물 입구 현관 유리문이 유난히 무거웠고 미처 뒷발을 빼기도 전에 먼저 와서 뒤꿈치를 찍었다. 뜨거운 피가 빗물에 같이 흘러내렸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찢어진 뒤꿈치가 아픈 것인지 내 삶이 아픈 것인지 모르게 피와 눈물이 빗물에 섞여 흘러내렸다.




1997년, 그 시절 대한민국은 IMF로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대기업들은 직원들을 감축했고 작은 중소기업들은 줄줄이 파산을 했고 나 역시 그 소용돌이 속에서 핵 펀치를 맞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 갈림길에서 선택한 방향이 내 삶을 통째로 바꾸는 길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전혀 몰랐다.


남편 덕분에 다니던 은행도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부산본부 노동조합 직원 3명 중 한 사람을 대구본부 노동조합으로 보내야 한다며 지원자를 요청했다. 차라리 발령이었으면 결과는 달랐을까? 세 사람 중 누구도 지원하지 않았고 우리는 회의 끝에 6개월씩 순환 근무를 하기로 결정했다.


내 차례가 되었고 부산역에서 대구까지 열차로 1시간 30분, 집에서 부산역까지 1시간 10여분, 열차 시간을 맞추느라 더 일찍 나서야 했고 출퇴근 시간만 하루에 6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두 아들을 데리고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것보다낫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둘 다 초등학생이었고 가까이 계시는 엄마가 아이들을 챙겨주시는 바람에 겨우 버텼지만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입술이 터지는 등 체력이 바닥이 나면서 백기를 들었다. 내가 퇴직을 하고 나니 대구로의 출근 명령은 감쪽 같이 없던 일이 되었다.(그때 아예 대구로 전근을 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 본부의 직원도 사라졌다)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이며 항상 그 선택이 옳을 수는 없다. 그만 자책하기로 한다.


대구 본부로 출퇴근을 할 때, 대구 소비조합의 문방구 코너 사장님의 작은 속상임이 나의 선택에 힘을 실었는지도 모르겠다.


부산 본부 소비조합에 문방구가 있으면 시내 각 지점에서 사용하는 복사지와 문구류들을 납품할 수 있으니 판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임대료나 수수료가 안 나가고... 해볼 만하지요


조언은 물론 문구 도매상도 소개받으며 다양한 문구류들을 사들이고 야심 차게 출발했다. 한 가지 문제는 무거운 A4용지의 배달이었. 결국 기동력이 있고 힘도 있는 친정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픈 손가락 같은 딸의 요청이니 무조건 도와주기로 하시고 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접었다.


무거운 복사지를 5박스 혹은 10박스씩 들고 내리며 땀을 뻘뻘 흘리시는 아버지에게 시원한 물 한 잔과 ‘아버지 고맙습니다.’라는 말씀 밖에는 드릴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노동조합으로 찾아오는 고객은 한정적이었고 시내 각 지점들이 다 소비조합 문방구를 이용하지는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장사지만 실상은 재고만 잔뜩 안고 월급은 고사하고 겨우 휘발유값만 챙겨드리는 정도였다. 부족한 딸 탓에 아버지는 졸지에 하시던 일도 잃고 수입도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오늘도 생글 거리며 웃는 얼굴의 그녀와 문방구 매대 앞에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언제나 미소를 머금은 얼굴과 깔끔한 옷차림이 멋진 사람이었다.

"가게가 안 나가서 걱정이네요. 삼거리고 좋은 위치인데 생각보다 빨리 안 나가네요."

"가계요? 무슨 가계요?"

“지금은 인쇄소를 하는데 사실 뭘 해도 상관없어요. 들어오는 사람이 원하는 업종을 하면 되는데...”


그때 운명의 신은 음흉한 미소를 숨기고 달콤하고 무서운 손을 내민 것이었고 나는 아무 의심 없이 그 손을 자발적으로 덥석 잡았다.


남동생은 요리 부심이 있었고 입버릇처럼 음식점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특히 면 종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칼국수 집을 하고 싶어 했다. 당시는 대기업의 하청인 중소기업에서 자리를 잡았고 무난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왜 그 생각이 났을까?

동생과 함께 칼국수 집을 해볼까?


장사니까... 경험도 없고 물정도 모르니까... 작은 가게에서 시작하면 되겠다 생각했지만 생글거리며 웃는 멋진 집주인이 악마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누나가 말하는 식당이 어딘데?”


“중앙동, 그리고 내가 은행에 근무하면서 주변에 아는 사람도 많고 하니 나는 서빙을 하고 너는 주방을 맡으면 괜찮지 않을까”


정말 작은 가게다. 9평에 4인용 테이블 5개 놓고 면 뽑는 기계도 놓고 솥을 걸면서 정말 아담하게 시작했다. 전세 2천5백만 원에 월세 65만 원, 전기요금, 수도요금 다 감안하면 기본 고정 지출은 100만 원 정도, 우리 두 사람 급여 2백만 원씩 계산한다면 월 매출 최소 5백만 원만 되면 된다.(이미 이 계산은 틀렸지만 그땐 몰랐다)


칼국수 한 그릇에 2천5백 원, 한 달에 2천 그릇이면 하루에 70그릇만 팔면 된다는 계산을 했고 휴일을 빼면 기본적으로 하루에 80그릇만 판매하면 그나마 승산이 있어 보였다.(벌써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장사의 기본은 이윤을 남기는 것인데 우리의 계산은 기본에서 한참 어긋난 계산이었다)


중앙동은 사무실이 밀집되어 있는 오피스 거리기 때문에 토요일 오후부터 휴일 분위기로 동네 전체가 조용하다. 지만 평일의 유동인구와 난 6년간 근무하면서 주변의 주민들이나 상인들과도 면이 트였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예상은 이번에도 너무나 야무지게 틀렸다. 한 달 한 달 지나면서 우리의 예상과 계획은 차근차근 무너졌고 10개월 동안 한 번도 월급을 챙길 수가 없었다.


이젠 우주의 기운까지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최악의 사태 IMP가 터진 것이다. 라에서는 위기 극복을 위해 금 모으기 운동을 했다면 직장인들은 점심 도시락으로 대체했고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2천5백원하던 칼국수를 2천3백 원으로 가격을 내렸다.


그럼에도 테이블 5개가 회전되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악의 상황이었다. 그나마 오는 손님들도 서너 명이 도시락을 들고 와서 뜨끈한 국물을 위해 한 그릇만 시키서 나눠먹기도 했다.(요즘처럼 1인 1 메뉴라는 문구를 적었다면...) 동생의 김치 칼국수는 오시는 분들에 가장 인기가 좋은 메뉴였지만 그 조차도 하루에 20~30그릇 정도가 최고였다.


계약 기간 1년을 버티기 위해 우리는 저녁 장사를 하기로 했다. 낮에는 칼국수 집, 밤에는 소주방으로...

아무거나 안주 한 상은 소주 서너 병은 거뜬히 마실 수 있을 만큼 푸짐했다. 아무거나 한 상으로 새벽까지 있는 손님도 쫓아낼 수는 없었기에 퇴근 시간이 점점 늦어지면서 내 몸은 소리 없이 망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도 매달 월세와 각종 공과금을 맞추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우리의 퇴직금이 든 통장은 매달 월세를 맞추느라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웃는 얼굴이 멋진 건물 주인은 우리가 장사가 되든 안되든 아무 상관이 없었고 월세 재촉만 할 뿐이었다)


월세를 받은 다음 날은 어김없이 가족들과 외출을 했고 저녁이면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올라갔다. 그들 역시도 우리가 내는 월세가 한 달 생활비였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 모습이 그렇게 얄밉고 부럽고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들의 웃는 얼굴만큼 우리의 심장은 빨경고등이 깜빡고 이대로 가다가는 둘 다 심장이 멎을지도 른다는 판단으로 계약기간 두 달을 남겨두고 결국 셔트를 내렸다. 그땐 이미 우리의 영혼과 통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바닥난 것은 통장만이 아니었다. 지난 10개월 동안 하루도 4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었고 끼를 제대로 먹어 본 도 없었10개월 동안 하루도 가게 문을 닫지 않았다. 순환이 되지 않았는지 온몸이 퉁퉁 부으면서 중이 12kg이나 비정상적으로 불어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가게 문을 닫고 나니 그동안 긴장 상태였던 몸 내려앉았다. 몸져누운 누나에게 동생들은 생활비며 병원비를 보내줬다. 모든 것이 나의 무지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만든 결과들이었다. 아버지도 동생도 내 앞에서는 원망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지난 10개월 동안 제대로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아이들은 활짝 열린 현관문을 향해 ‘어머니’를 외치면서 달려와 안겼다... 그 아릿함에 목이 메었고 북받치는 가슴은 눈물로 젖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장사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그 속담의 뜻을 정확하게 알게 됐다.

장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평소 가깝게 지낸다고 해서 결코 그 사람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던 대가가 그렇게 클 줄은 몰랐다. 지막 보증금까지 밀린 월세와 각종 공과금으로 대체되고 나는 말 그대로 알거지가 되었다.


나름 무서운 세상이라고 여겼던 직장 생활은 그나마 울타리가 있는 안전한 곳이었다면 장사는 흡사 약육강식의 무림 강호라는 큰 경험과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 장사라는 깨달음을 얻으면서 너무 비싼 수업료를 지불다. 그리고 다시는 장사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출산의 고통으로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지만 엄마들은 둘째, 셋째를 임신한다.


나 역시 그 시절의 아픔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뭐에 씐 듯이 통신 판매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방송으로 판매하는 것이 재밌었지만 결국 먹거리를 oem으로 제조하고 판매하면서 똑같은 실패를 경험했다.


장사를 잘하는 DNA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내가 왜 장사를 하면 안 되는지 확실히 깨달았고 앞으로는 진짜 진짜 없을 일이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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