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듀페미 취미에세이 #3
바야흐로 21세기 자본의 시대, ‘취미’는 돈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자기 계발/비대면 교육 시장의 인접 시장이자 큰 축으로 여겨지는 ‘취미 시장’, 90년대 생의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다분히 자본의 냄새가 나는!) 취미를 떠올려보자.
트렌드가 곧 돈으로 이어지는 작금의 시장에서, 유수의 취미 관련 스타트업이 90년대 생-MZ세대를 타깃으로 취미 플랫폼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만들겠다며 투자를 받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서도 X래스 101, X잉, X고 등의 애플리케이션 혹은 커뮤니티를 통해 취미를 위한 소비를 경험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스몰토크의 단골 주제가 되는 X플릭스 조차도 매월 정액이 나가는 구독료 소비지출에 해당한다. 결국 ‘취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취미 시장에서 나는 얼마짜리 고객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소비에서 벗어나 생산성 증대를 위해 시간과 재화를 투자하는 활동–재테크와 같은. 물론 돈 벌기가 취미이신 분들도 있겠지만. 코딩도 취미로 분류되고 있다. 이쯤 되면 그냥 직장 외 시간 소비 아냐?– 관련 강의 등도 취미 카테고리로 존재하는 상황이니, 내 머릿속에 취미 이퀄 돈 공식이 세워진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래듀페미 모임에 참가하면서는 돈이 안 드는 취미를 찾아 헤맸다. 다른 사람들의 취미 목록을 보면서 손민수*(네이버 인기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의 캐릭터, 손민수의 행위를 빗댄 신조어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고 따라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여기선 따라함에 중점을 두고 쓰였다.)를 시도했다.
런데이도 깔아보고 무료 게임도 시작해보고 집에 있는 책을 골라 서평도 써보려고 했는데, 작심삼일이 웬 말이냐 이틀 만에 포기했다. 이 시대 젊은이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고려하여 추가로 수익을 견인할 수 있는 취미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학업과 업무 시간 외에 시간을 내서 생산적 활동을 하자니 굉장히 피곤했다.
왜 다들 이렇게 열심히 사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금 던지고 싶어졌다. 다 같이 적당히 살면 안 될까요? (안되겠지만! 불같은 취업난과 집값의 시대여!)
많은 실패 끝에 모임이 끝나가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내 취미의 정체성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남들이 공들여 만든 콘텐츠를 쪽쪽 빨아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드러눕는 것이 좋다. (드러누워서 볼 수 있으면 더 좋다.) 한평생 자기소개서 란에 고민 없이 독서를 끄적일 수 있었던 내 ‘원래 취미’를 이쯤에서 밝혀보도록 한다.
나는 웹소설과 웹툰 읽기를 좋아한다. 소비 없이는 즐길 수 없는 이 취미를 15년째 이어오고 있다. 외할아버지부터 어머니, 내게로 대대손손 이어진 무협지 읽기 취미는 웹소설의 시대가 도래하며 인앱 결제의 막을 열었다.
‘원래 취미’와 거리를 두기 위해 모임에 참여했기 때문에, 취미의 정체성을 깨닫고 다소 괴로워졌다. 돈이 없는데 돈 드는 취미를 가지면 어떡하란 말인가! 그렇다고 당장 내 통장에 추가 수입을 지속적으로 유도하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을 취미로 이름 붙여도 되는 걸까? (물론 모든 취미가 소비 지향적인 것은 아니며 생산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돈을 벌기 위한 것이나 자기 계발 목적의 무언가에 취미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을 볼 때면, 즐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메시지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나조차도 생산적이지 않은 내 취미에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즐기기 위해 하는 일, 이라는 취미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를 다시 되새겨본다. 취미에서 자본과 평가와 나에 대한 여러 증명을 떼어 놓고 생각해보자. 나는 소설을, 만화를 읽을 때 정말 즐겁다. 밤을 꼴딱 새워 읽을 만큼 좋아하는 소설과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재미있는 소설, 대여했지만 전권을 다 갖고 싶어 다시 소장해버린 만화들이 있다.
내 작고 귀여운 월수입에서 식비 다음으로 가장 많은 지출이 이루어지는 이 취미에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앗, 또 자본 생각을 해버렸네.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돈이 없는데! 원래 돈이 없는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이 진심의 증명 아니겠어?
문제 1. 이 글에서 돈이 없다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세어보시오. 아무튼 1억 2천 현금이다, 너의 취미를 위해 쓰도록, 이라고 말하며 내게 현금을 가져다줄 사람은 없으니 (혹시 있다면 연락해주세요) 이제는 적당한 소비와 수입 활동의 균형을 맞추는 일만 남았다.
이렇게 ‘쓰기 위해 번다/퇴근 후에 진짜 내가 된다’라는 mz세대 라이프스타일 분석의 어디 한 축에 들어가는 고객 유형이 되어버렸다. 돈이 안 드는 취미를 찾아 헤맸으나 소비의 늪으로 다시 빠져버리고 말았으니, 이는 내 즐거움이 누군가의 창작 노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겠다. 노동의 대가는 지불해야 마땅한 일이니. 그를 위해 내가 노동을 그만둘 수 없다는건 좀 슬프지만.
모임에 참여하며, 취미란 것을 내 안에서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싶은지를 생각했다. 여가까지 생산을 위해 쓰는 것을 고민할 만큼 부족한 재화를 가졌지만, 얼마 없는 그것뿐이라도 잘 그러모아 내가 좋아하는 일에 쓰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산적인 취미, '돈이 되는', ‘쓸 만한’ 취미, 누군가에게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취미를 갖고 싶다는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그런 세상이니까. 그럼에도 내가 정말로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게 내 행복에 더 가깝고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괴로움은 꼬깃꼬깃 잘 접어서 어딘가로 던져보자.
나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평일 6시 발행되는 재미있는 웹소설에 삶의 일정 부분을 기대어 살게 될 것이다. 언젠가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이어가는 그 모든 노동 사이에서 유일하게 즐거움을 주는 취미니까. 또 다른 무언가를 해볼 수도 있겠다.
나가서 하는 취미, 소비만 하는 취미, 생산하는 취미 세 가지를 가져야 삶이 윤택하다는 소리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이런 말은 누가 하는 걸까?) 여기서 더 투자할 시간은 없겠지만, 혹여나 운 좋게 시간이 남는다면, 정말로 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좀 더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구에게도 증명하거나 설명할 필요 없는, 쓰잘데기 없더라도 온전한 나만의 취미와 삶을 위해.
(제게 1억 2천 현금을 주실 분은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고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증여세는 직계존비속이 아닌 무관계인 경우 13,580,000원! 모르는 사람에게 1억 2천을 대가 없이 지불할 당신이라면 아주 싼 금액!)
Edited by. 설목
노동이 싫은 사회초년생. 노동 exit을 꿈꾸지만 앞길이 막막하다. exit할 때쯤엔 지구가 망하는 게 아닐까 두렵기도 하지만, 일단 오늘의 웹소설 읽기가 삶의 낙인 페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