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리고 보니 직장인

어정쩡한 꿈들로 꾸물거리는 동안 도착한 어딘가

by 레브

나는 '직장인'이다.

나는 어쩌다 직장인이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어정쩡한 꿈들로 꾸물거리는 동안 도착한 어딘가' 정도인 거 같다.


어릴 적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생각해서 적어내야 할 때는 뭐라 적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는 선생님과 같은 직업을 선택했던 거 같고, 중학교 때는 감정의 롤러코스터 속에 친구관계, 이성관계, 외모에 대한 고민에 가려졌었다.


어렴풋이 이게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직업을 정한 건 고등학교 때다.

고등학교 때는 문과와 이과라는 선택 앞에서 앞으로 살아갈 큰 방향에 대해 부랴부랴 생각해야 했다.

물론 문과 이과가 삶을 결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처음 하는 큰 선택 앞에 자연스레 숙연해졌던 나였다. 나는 뭘 배우고 싶고 어떤 장래를 희망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었기 때문이다.


문과 이과를 선택해야 하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왔다.

"나도 같이 이과를 갈까..? 그렇지만 수학을 못하는데 괜찮을까...?"

내 고민은 그저 이 정도의 수준이었다. 사실 지금도 비슷할지도 모른다.


독서실에서 한창 고민을 하는 나를 보며 친구는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줬고

나는 우선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때 내가 앉아 있던 독서실의 공기와 장면이 떠오르는 걸 보면 나름 꽤 선명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뭘 좋아하지?


블로그로 해외여행 포스팅 글을 많이 보는구나, 나는 해외에 많이 나가는 직업을 가지고 싶어. 세상이 넓다는 사실이 두근거리고 세계지도는 멋지고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

여행을 다니는 사람..? 여행작가? 승무원? 이렇게 직무분석 없이 충만한 감성분석으로 나의 막연한 꿈이 그려졌다. 승무원.


누군가가 그게 왜 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쿨하게 답하지 못했던 나의 장래희망.

뭐랄까.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행이 하고 싶어서 승무원을 하고 싶다니 라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아서였던가. 사실 돌이켜보면 당연히 이것도 그 직업을 선택하는 이유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승무원은 엄청 예뻐야만 가질 수 있는 꿈같은 느낌이 강했다. 하고 싶지만 쉽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실패할 것 같고 누군가가 비웃을 것 같아서 누군가에게 말하기 꺼려지기도 하는 꿈이었다.

누군가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누가 묻느냐에 따라 답변의 속도가 달라지곤 했다.


그렇게 문과를 갔고 대학교를 졸업했고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다양한 일을 했다. 승무원 채용에 지원하고 스터디도하고 그룹과외도 받고 서비스 경력을 쌓으려 서비스직종에서도 일했다. 서비스직을 하다 교대근무를 못 버텨 퇴사를 하고 기나긴 소파생활을 하며 유튜브를 보며 지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지원해 본 승무원 시험은 CV드롭, 영어시험을 통과했지만 그다음 단계에서 떨어졌다.

탈락인 것을 확인하고 인비테이션(외항사 채용에서 이력서를 제출, 스몰토크를 통과한 지원자에게 주는 소중하고 고귀하고 눈물 나게 행복한 통과서류)을 바라보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희망이 솓아오르는 종이 한 장. 외항사를 지원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인비테이션. 그것이 얼마나 반짝이는 존재이자 희망인 것을.


너무 슬펐지만 익숙해진 슬픔이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긴 시간 지쳐있던 꿈이 인비테이션 한 장으로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항상 넘기고 싶었던 한 단계는 넘어봤구나, 지금까지 네가 해왔던 것들이 헛된 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열심히 했고 네가 보낸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었을 거다.


그 뒤에 나는 승무원 준비를 뒤로하고 회사를 들어와 직장인이 되었다.

사무실 키보드소리, 서류더미, 결재판, 보고, 엑셀, 취합, 메일, 전화, SAP. 컴퓨터 앞에서 내 생기와 활력을 갈아 넣어서 주어진 일을 끝내야 하지만 어차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상의 반복.


그렇게 오늘도 나는 내 마음과 체력을 꾸역꾸역 갈아 넣었고 토해져 나오는 서러움과 버거운 마음은 어쩌면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더 집중을 해서 더 했어야 했을까 내가 나약한 소리를 하는 걸까 하는 고민들과 같이 삼켰다.


처음 입사를 할 때의 마음은 일하면서 경력을 쌓아서 내가 원하는 회사에 지원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던 것 같다. 코로나와 함께 채용도 중단되며 내 꿈은 점점 흐릿해졌고 길을 다시 잃어 갔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는 직장인이 되었다.


입사 전에는 너무나 간절했고

입사 후에는 너무나 먹먹하고 무거운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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