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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Jan 30. 2022

연인은 왜 싸울까

맬컴과 마리와 말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을 한층 더 깊게 달이면 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된다. 계속 불을 켜놓고 냄비 밑바닥이 타들어갈 때까지 불맛을 입히면? 영화 <맬컴과 마리>가 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맬컴과 마리>는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연인 간의 다툼을 조명한다. 사실 적나라하다는 표현도 약하다. 맬컴과 마리는 최악의 말을 던지며 서로를 상처 입히고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 없이 노출한다. 머리가 욱신거릴 지경이다. 중간에 언어로 폭력을 저지른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게 딱 맞다. 이 영화는 거의 치사량의 언어폭력을 제공한다.


연인은 왜 싸울까? 이 질문을 가족이나 친구로 확장할 수도 있겠지만, 연인 간의 다툼은 조금 특수한 구석이 있다.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남보다도 더 멀어질 수 있는 관계. 그 모순을 안고서 오늘도 낭만성과 현실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물론 싸우지 않는 커플도 있고 이제는 그 모든 다툼에서 초월하여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싸움의 씨앗은 지뢰처럼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폭발할 수 있다.


그럼 이 모든 다툼의 트리거는 어디에 있을까? 다양한 이유, 다양한 케이스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말이 아닌가 싶다. 사실 뻔하다. 말이라니. 말투 좀 예쁘게 하고 서로를 배려하라는 소리인가? 이런 생각도 든다.


연인은 말로서 서로를 부드럽게 쓰다듬기도 하고, 맬컴과 마리처럼 날을 단단히 세우고 상처 입히기도 한다. 모든 인간관계가 조금씩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연인끼리는 유독 더 민감하다.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다른 관계에 비해 높기 때문이다. 그 기대를 조금 내려놓으면 관계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나마) 원만해질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특수성을 희생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뭐하러 커플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우리 사이를 설명하겠는가?


결국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동시에 노력해야 한다. 생각보다 꽤나 의식적이고 번거로운 노력을. 영화 <맬컴과 마리>에서 두 사람이 다툰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서로에게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서'다. 러닝 타임 내내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대사를 꽉 채운 영화지만 말이다.


적절한 시간에 적절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풀어내지 못한 말은 시간이 지나 불맛을 잔뜩 머금은 채로 터져 나온다. 마리는 영화 말미에 맬컴에게 말한다. 넌 이러이러하게 내게 말했어야 한다고. 일종의 한이 느껴진다. '서운한 여자'와 '무심한 남자' 클리셰로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결국은 <사랑하러 갑니다> 매거진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정확한 사랑에 관련된 내용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언급한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고통을 받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럼 어떻게 정확히, 충분하게, 또 배려심 있게 상대방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기분이 좋을 때는 잘 실천하다가 조금만 감정이 상하면 바로 극단적인 말을 내뱉는 게 사람이다. 그러고는 핑계를 댄다. 오늘 일이 잘 안 풀려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상사에게 한 소리 들어서 등등. 상대방은 말을 통해 나라는 사람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싸움의 단서가 하나둘씩 쌓여간다. 언젠가 폭발할 때까지.


연인 관계에서 가장 간담이 서늘한 순간은 그렇게 매복하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이 갑자기 튀어나올 때다. 그때그때 풀어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처음은 사소하다. 무심하게 지나가듯 던져진 말투, 문장 안에서의 미묘한 뉘앙스, 깜빡하고 잊은 감사 인사나 사과 등. 다툼의 계기는 그렇게 생각보다 소소하다. 그때는 넘어간다. 처음이라면 더욱더 쉽사리.


그런데 곱씹을수록 상처가 된다. 잠자리에서 뒤척이면서 감정과 논리는 더 커져만 간다. 딱히 반응이 없으니 상대방도 그런 말과 행동을 반복한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간히. 화가 난다. 표정이나 말투에서 감정이 배어 나온다. 상대방이 말한다. "괜찮아? 뭐 안 좋은 일 있어?" (사실 이것도 부드럽게 말한 버전이다) 내면을 들킨 것 같아 처음에는 아니라고 한다. 약간의 수치심과 다량의 자존심을 안고서. 상대가 계속 캐물으면 분노와 서운함, 공포감이 함께 배어 나온다. 그렇게 1차대전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매번 캐물으면 상대방은 짜증이 난다.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아차 싶은 표정으로 눈치만 보고 있으면 좋지 않다. 지금 연애를 하는 거지 면접을 보는 게 아니다. 상대방도 사람이다. 내가 완전하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무심한 말을 툭 던질 수도 있다. 애초에 상처가 될 말을 하지 않는 게 중요하겠지만, 생각치 못한 이유로 상대방이 감정을 다쳤다면 이를 잘 풀어가야 한다.


당사자의 대처도 중요하다. 지금은 내가 피해자이지만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하기에 따라 상대를 '감정 테러리스트'로 만들 수도 있다. 둘만 있는 조용한 자리에서 차분하게 얘기를 한다면 상대방도 납득할 수 있다. 느닷없이 감정을 마구 폭발시킨다면 상대방 입장에서도 황당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다고? 그런데 그게 나에게는 고작이 아니다. 며칠 밤낮을 고민하고 고민한 결과 이미 헤어지는 엔딩까지 다녀온 나다. 어떻게 이게 고작일 수 있는가? 그런데 상대방은 갑자기 넘겨받은 감정의 바통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감정의 증폭 과정은 오직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다. 상대방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조심스레 건넨 부드럽지만 단호한 경고의 한 마디에도 왜 이렇게 과민 반응하냐며 도리어 화를 내거나 무시한다면? 그런 사람과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아쉬운 게 있다면 붙들어도 좋지만 그럴수록 손해를 보는 건 나 자신이다. 물론 매번 사소한 일이 있을 때마다 헤어진다면 장기적인 관계는 요원하다. 하지만 자신을 매번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사람이라는 건 대개 없는 법이다. 나 역시도 소중한 사람 아닌가.


세상에 나쁜 연인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모두가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관계가 점점 틀어지고 상대방이 미워질 때가 있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으리라. 관계를 이어가다보면 애써 무시했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이 드러난다. 그 순간이 매번 아름답지는 않다. 도저히 넘기지 못할 때도 있다. 간단한 해결책은 이별이지만 현실에서 막상 말하기는 어렵다. 헤어지자고 쉽게 던지는 듯한 사람도 실은 고민이 많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사실 끝이 없다. 모두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모두가 만날 수는 없다. 좋은 사람이더라도 나와 맞다는 보장도 없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 이상으로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 한 가지만 고쳐야 한다면 그건 말이 아닐까 싶다. 말투, 비언어적 표현, 워딩, 뉘앙스 등 말에는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할만한 힘이 있다.


그런데 원래 자기 말은 스스로 인지할 수 없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걸 의식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말을 찬찬히 관찰해보자. 나에게 말하는 사람이든, 남에게 말하는 사람이든 누구라도 좋다. 그 사람이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지, 어떤 식으로 표정을 짓고, 어떤 톤으로 말을 하는지, 사람에 따라 말투가 달라지는지 등. 특히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강력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에게 상냥하게 잘해주더라도 서빙을 하는 종업원에게 하대하는 말투로 주문을 한다면 고민해봄직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쉬워지는 순간, 그 사람은 금세 이빨을 드러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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