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건 '사람'이어야 한다
사랑을 하다 보면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 한 가지. 상대방 또한 사람이다. 나만큼이나 복잡하고, 나만큼이나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 사실을 잊는 순간 상대방에 대한 무의식적인 대상화가 발생하게 된다. 대상화란 상대방을 어떤 목적이 있는 일종의 사물로 취급하는 태도를 말한다.
영화 <그녀>(원제: Her)는 이런 현상을 비유적으로 그려낸다. 주인공 시어도어는 다른 사람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다. 실체가 있는 사람의 가짜 감정을 뽑아내는 인물이다. 그에게 찾아온 사만다는 실체가 없는 운영체제지만 진짜 감정을 표현한다. 사만다의 감정이 전기신호로 만들어졌는지, 영혼에서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시어도어가 '실제로'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결국 시어도어는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실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최소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만다는 컴퓨터 운영체제이다. 여기에서 보통 두 가지 논의가 등장하게 된다. 하나, 사만다의 감정, 혹은 사랑은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둘, 사만다에 대한 시어도어의 감정은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작품에서는 애초에 사물인 운영체제를 두고 감정의 진의 여부를 묻는다. 진짜 질문은 이거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대상화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감정에는 진정성이 있을까?
우선 대상화를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 대상화는 실존주의적으로 표현하면 상대방을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 사물'로 보는 시선이다. 즉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물건처럼 여기는 것이다. 성적 대상화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상대방의 주체성, 실존, 자아 등을 인정하지 않고 성적인 매력으로 존재 의의를 덮어버린다.
영화의 제목이 주격인 She가 아닌 목적격인 Her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어도어는 은연중에 파트너를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자신의 소유물이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런 태도가 애초에 사물인 사만다에게 더 노골적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그래서 시어도어는 사만다가 떠난 뒤 전 부인에게 사과편지를 쓴다. 처음으로 상대방을 주체로 인정하는 모습이다.
사랑에 대상화가 개입하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1. 사랑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
2. 주체성을 박탈한 대상에 대한 사랑은 진실된 감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난 널 사랑해'라고 했을 때 내가 사랑하는 건 누구일까? 혹은 무엇일까? 시어도어는 사만다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사만다가 제공하는 삶의 편의성을 사랑한 걸까? 철학자 니체는 자신을 좋아하는 한 여인을 만난다. 하지만 그 여인이 사랑한 건 니체라는 사람이 아니라 니체의 철학이었다. 니체는 그 여인과의 사랑을 꿈꾸었지만 둘은 결국 이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여인은 니체를 대상화했다. 주체의 객체의 사랑은 불완전하다.
'넌 나를 왜 사랑하는 거야?'라는 질문은 사랑의 대상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확인 절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가진 '무언가'을 사랑하는 건지, 애초에 사랑을 하기는 하는 건지, 둘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대상화되지는 않았는지.
대상화는 상대방의 주체성을 박탈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체성이 없는 존재로 인식해버린다. 주체성을 박탈당한 상대방과의 관계가 과연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걸 성숙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관계의 어긋남은 모순을 만들어낸다. 결국은 그 틈이 한없이 벌어져 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을 때까지.
그렇다면 현실에서 대상화는 어떻게 나타날까?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태도, 상대방의 행동을 자신의 입맛대로 통제하려는 태도, 상대방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종속시키려는 태도,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태도 등이 대표적이다. 대상화는 대개 은밀하게 진행된다. 흔히 말하는 가스 라이팅과 연계되어 피를 말리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동정도, 동경도, 대상화도, 신격화도 온전한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런 감정은 쉽게 부정적인 태도로 이어진다. 연인 사이에서의 자격지심이 대표적이다. 결국 상대방을 긍정해야 한다. 긍정이란 무조건 좋게만 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영화 <그녀>의 포스터 문구가 유독 가슴에 남는다. "우리는 모두 같은 존재예요." 이는 인공지능인 사만다의 마음을 대변하는 문구이자 극 중 대상화된 이들의 외침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건 '사람'이다. 사람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