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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 율 Oct 17. 2023

식사 벌레

-동거인-


아침에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놔도 울리던 알람소리

이 아침엔 왜 들리지 않았을까?

점점 아내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청력도 희미해져 간다.

이제 잡아 먹히는 일만 남았다.


요란한 드라이기 소리에 눈을 떴다.

화장대 앞에 앉은 거대한 절지동물이 머리를 말리는지 촉수를 다듬는지

그 어떤 준비를 하는 듯했다.

죽은 척하는 게 지금은 상책이다.

여러 가지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구직 중이라도 늦잠을 자는 당위성은 확보하고 자야 했다

어제는 그런 이유가 생겼다.

대리운전을 마치고 새벽 3시가 넘어서 들어왔다.

평일치고 콜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아내는 원래 10시 전 후에 잔다. 설렁탕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대략 아침 7시 50분이다.

나는 아직 수면 중이어야 한다.


사라락 옷 입는 소리와 액세서리 부딪히는 금속성의 소리

마지막으로 향수 뿜는 칙~ 소리와, 약 3초 후 문 닫는 소리가 이어진다.

잠잠하다. 폭풍 전 먼바다처럼 음소거가 됐다.  

그렇게 하루의 시작을 유리 깨지는 듯 한 잔소리를 듣지 않고 시작하는 게 낫다.

긴 하루의 시작을 기분 좋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더미 같이 쌓인 일 들 앞에 담배만 축 내야 하기 때문이다.

담배도 이제 끊어야 하는데...


가족 중에 흡연자는 없다.

이렇게 까지 아내에게 신뢰를 잃은 이유 중 하나가 담배다.

냄새도 싫다. 건강이 우선이고 명대로 살라면 당장 끊으라고 아내는 말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또 핑계를 만들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못 참겠다고...

현실은 경제적인 위협이 시시각각 좁혀오지만 여유와 유머는

잃고 싶지 않다. 가끔 꼰대소리 들으며 젊은 친구들을 대할 때 어디선가 들은

유머 한카피와 퀴즈를 내는 쾌감은 참았다 피우는 담배 한 모금처럼 짜릿하다.

예전에 000시리즈처럼.

출제자는 그 맛에 최신 시리즈를 저장한다.


술과 담배 심지어 마약까지 판치는 세상.

막내만 빼고는 모두 성인이고 고등학생인 막내도 담배를 극혐 한다.

노담시대! 나만 미개인의 삶을 살고 있다.




가족들이 국궁의 화살처럼 흔들거리면 빠르게 집을 떠난 뒤

출근과 등교의 흔적이 남았다.

널브러진 옷가지, 치운다고는 한 것 같지만 개운치 않은 식탁

규모가 작은 전쟁터의 잔해를 보듯 우울해진다.

햇빛이 드는 창가에 근위병처럼 서있는 고무나무와 불꽃처럼 자라나는 연필 선인장이

무심하게 응원하 듯 쳐다보고 있다.

주섬 주섬 정리하고 식탁을 치우고 밥을 차려 먹는 모습까지 지켜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물 주는 당번은 아니기에 식물의 밥을 챙기지는 않는다.

당번이 없으면 그들은 말라죽거나 뿌리가 썩어 죽기 때문이다.


어느 방에서 강아지가 터덜터덜 걸어 나온다.

주인에게 아침인사를 잘하는 강아지 '쿠나'다

녀석도 늦잠을 잤는지 와락 달겨 들지는 않는다.

퇴근 때 방방 뛰며 식구들 반기는 컨디션은 아닌 듯싶다.

심기가 불편한 내속을 읽기라도 하 듯 눈치를 살핀다.

이놈의 밥은 또 어쩐다. 밥그릇에 사료가 장전되어 있지만

입맛 까다롭고 사람의 맛을 알아버린 놈은 언제부턴가 반 단식 중이다.

네놈 밥까지 챙길 의무가 내겐 없다.


햇살이 반뼘쯤 집으로 더 스며들었다.

긴 하루의 시작은 그렇게 우선 눈에 띄는 동거동물과 식물, 그 밖의 보이지 않거나

아직 눈을 맞추지 못한 그 밖의 생명체들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눈에 거슬리는 잔해들과 당장 봐서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정리만 한 채

늦은 아침을 먹는다.

식탁 위 잘 차려진 반찬과 약간 식은듯한 국, 숟가락, 젓가락 -- -은

연기처럼 '펑' 하고 사라진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한 컷이다.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급하게 설거지통으로 옮기면서 흘린 국물자국과 물 잔 놨던 서너 번 정도 겹친 동그란 물 링

다행이게도 그릇은 각자 담그고 갔구나

행주도 말라있다.

수도를 틀고 행주를 저셔 식탁을 닦는다.

버걱버걱 행주가 굳은 자국을 밀어서 지우고 있다.


냉장고를 열어 냉동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위잉~2분30초

가스레인지 위 냄비엔 미역국이 있다.

검게 장막 친 미역줄기 사이로 부재료가 뭔지 냄새를 맡아본다.

비린가? 고소한가?

오늘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바닥을 포클레인처럼  긁어 보기로 한다.

곧이어 떠오르는 잘 찢긴 황태살.

오늘아침은 황태미역국과 김장김치다.




식사는 생각보다 일찍 끝난다.

마음이 급하다. 들를 곳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다.

어느새 집안은 형광등을 꺼야 할 만큼 밝아 있다.

사람은 아프면 눕는다. 일을 하지 못한다. 문명과 돈이 환자를 보살피거나 그 누군가가 대신한다.

그러나, 하루도 빠짐없이 해는 뜨고 또 진다. 흐린 날에는 구름에 가려 맑은 날에는 보란 듯이...

또 어떤 날에는 결근하듯이 어둡거나, 먹구름에 가려 빛 한줄기 내리지 못하고 왔다 간다.

그러나,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뜨고 지는 그 일을 수억 년 동안...


밖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본다.

뭔가 빠트린 게 없나?

없는 것 같다.


출근길에 커뮤니티센터에 들렸다.

기관에 내야 하는 등본서류를 뗐다.

무심히 살피던 중 내 이름 옆 동거인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배우자도 아니고 동거인! 아이들은 다행히 자녀로 되어 있다.

몸속 소중한 장가 하나가 쑤욱 빠져나간 것처럼 허전하고 고통스럽다.

얼마 전 이력서를 내려 등본을 뽑아 든 딸아이의 눈에도 분명 보였을 서류상의 불편함.

완전한 동그라미에서 커다란 이가 빠져나간 것을 느꼈을까?

나처럼 기분이 이상했을까?

스스로 칼로 도려낸 그 빈자리는 다시 채울 수 있을까?

한 줄의 비정상적 가족구성원.

무책임하게 선택한 아내와의 헤어짐.


맑던 하늘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우산을 켜기 시작한다.

아침엔 맑았는데...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여학생은 뛴다.

백발의 노인은 상점 아래 처마밑으로 잠시 들어간다.


아침에 햇살조각을 반갑게 맞았던 나는 짧은 시간 안에 변한 하늘을 본다.

배반감에 그냥 걷는다. 차 있는 곳까지 몇 걸음만 가면 된다.

동거인으로 표기된 등본종이가 젖지 않도록 가슴속에 품었다.

거짓말처럼 종이의 포지션이 동거인이 아닌 배우자로 변했으면...

 

하늘을 살핀다. '얼마나 올랑가?'

빗방울이 눈에 들어가 짠 기운이 희석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건다. 와이퍼를 켰지만 눈앞이 더욱 뿌였다.

시야가 흐려져서 액셀을 못 밟겠다.

와이퍼는 뻐걱뻐걱 소리를 내며 유리창의 빗물을 연신 닦아 낸다.

방금 오기 시작한 비는 금세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눈앞이 좀 더 선명해지면 출발해야겠다.

비가 더 굵어지는지 창 밖에 우산이 더 많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비가 내렸다.


한 달 전 우리는 남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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