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04. 변화의 시작
배정환
카페 개업하고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친구들도 다녀갔고, 카페 동기들도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처음 해보는 자영업이라 어리둥절하게 시작했는데 카페가 제법 자리를 잡아갔다. 매스컴에서는 40일 넘게 장마가 이어질 거라며 비 피해를 대비하라고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덕분에 매장 안에 손님도 꾸준히 유지됐다. 눅눅한 집에 있는 것보다 시원한 카페에서 책 읽고, 영화 보는 거 아닐까 싶었다.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손님에게 뭐라 말하고 싶어도 태성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회전율도 떨어져 매상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장마가 끝나면 매상에 어떤 변화가 올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처음 개업한 카페 동기가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고 했다. 동기는 목을 잘못 잡은 것 같다고 했지만, 실패라는 게 어디 하나의 원인 이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손님에게 불만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매장 메뉴에는 드립커피가 있었음에도 주문량이 많지 않았다. 손님에게 드립 커피를 권해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아메리카노 아니면 라테였다. 손님들은 원두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태성은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며 뭔가 바꿔야 한다는 사실에 의기소침했다. 손님에게 더 이상 드립커피에 대해 묻지 않았다.
"고소한 커피와 산미 있는 커피가 있습니다."
"네? 아무거나 주세요."
"고소한 걸로 해드릴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나름 고급 서비스라고 생각했지만, 여기는 그런 게 통하지 않았다. 젊은 인구가 많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커피에 대해 무지한 걸까? 태성은 바리스타 학원 다닐 때 원두 종류에 관해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책도 사보고 설명도 외웠다. 하지만 원두에 대한 설명은 한 달 동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주 오던 총각을 붙잡았다.
"손님 혹시 커피 맛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요?"
"커피 맛이요? 마실만 해요."
"제가 아는 목사님으로부터 블랜딩 원두를 받은 건데요. 이게 대회에서 2등 한 원두거든요. 향이 독특하지 않아요?"
태성은 은근 기대감으로 물었지만 총각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맛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없나요?"
"사장님, 저 그런 거 몰라요. 그냥 분위기 좋아서 온 건데요. 공부하기 좋고."
태성은 카페 분위기와 커피 맛 사이에서 혼란이 찾아왔다. 카페의 정체성은 커피맛보다는 분위기인 건가? 그렇다면 아무 원두를 써도 괜찮다는 건가?
"스타버즈 커피는 탄 맛이 강하잖아요. 그런 커피 좋아하세요?"
"거기는 일단 크고, 화장실도 2층에 있어서 좋아요. 아르바이트 생들이 자주 올라오지 않으니 부담도 없구요. 스타버즈 커피가 맛있어서 가는 것은 아니구요. 편해서 가는 거죠."
더 이상 커피 맛을 묻는 건 소용이 없어 보였다. 여기 분위기에 대해 묻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사장님 여기도 분위기 좋아요. 오래 있어도 사장님이 눈치 주지 않고요. 그것뿐이에요. 저는 커피맛 잘 몰라요."
눈치를 주지 않은 게 아니라, 매일 오는 것만이라도 감사해서 아무 말 못 한 것뿐이다. 손님이 늘어가며 회전율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보니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여성 손님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다르지 않았다. 역시 작은 카페는 커피 맛보다는 분위기였고, 머물기 좋은 곳, 집중하기 좋은 곳이 홍보에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리스타 자격증 따위도 필요 없었다. 그냥 머신 사용법만 배우면 될 것을 오래 공부했나 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태성도 직장 다닐 때 굳이 원두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스와 핫만 구분했고, 대부분 아메리카노라를 주문했다. 알아서 나쁠 건 없지만, 그럴 시간에 카페나 돌아다니며 인테리어와 여론 조사나 할걸 그랬나 보다.
테이블에 앉은 손님도, 카운터의 태성도 태블릿과 책에 빠져 있을 때 여자 손님이 들어왔다.
"사장님 빨리 아이스 카페라테 두 잔 부탁드려요."
태성은 손이 빨라졌다. 조금 전까지 책 읽던 여유는 어디 가고 커피를 내리고 얼음을 채웠다. 두 잔이 미처 나가기도 전에 또 다른 손님이 들이닥쳤다. 카페 안에 여유자리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테이크아웃으로 주문을 바꿨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태성은 양해를 구하고 서둘렀다. 문이 열리고 두 손님이 들이닥쳤다. 조용하던 카페에 기다리는 손님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커피가 나가기도 전에 네 번째, 다섯 번째 손님이 들어왔다. 인근에 태성이 모르는 무슨 행사가 있었나 보다. 테이크 아웃 손님이 한 번에 밀려들기는 처음이다. 태성은 살짝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마음이 급해지니 과일주스 용량도 헷갈려서 붙여둔 메모확인까지 하느라 손발이 꼬였다.
갑자기 남자 하나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한 시간 전부터 주방 가까이에서 노트북을 하던 남자였다.
"아닙니다. 제가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저 이래 봬도, 카페에서 오래 일했습니다. 이렇다 손님 다 잃겠어요."
태성은 염치 불고하고 남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남자는 태성보다 더 손놀림이 빨랐다. 처음 마주하는 주방인데도 마치 자기 주방 다루듯 재빨리 1회용 컵을 세팅하고 얼음을 채웠다. 태성이 주문을 받고 커피머신을 다루면 남자는 잔을 세팅하고 홀더를 입히고, 캐리어에 담았다. 빨대 비닐을 벗길 때도 입 닿는 부분은 남기는 센스가 돋보였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을 때 태성은 인사를 나누었다.
"감사합니다. 보통 솜씨가 아닌데요."
"사장님, 가게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셨나 봅니다. 도와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저도 오랜만에 해보네요. 저는 김도성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나누며 여성 손님에게 커피를 내어드리는데 손님이 말을 걸었다.
"저, 라테 시켰는데요. 아메리카노를 주셨네요."
태성이 나서서 사과하고 커피를 돌려받았다. 그때 도성이 라테를 태성의 손에서 낚아채며 말했다.
"손님, 혹시 같이 커피 마실 분 계시나요?"
"글쎄요..."
"라테는 서비스로 드릴 테니까. 소중한 분과 같이 드세요."
도성은 능숙하게 캐리어에 라테와 아메리카노를 담아 여자 손님에게 건네주었다. 여자 손님이 활짝 웃으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손님~ 대신, 자주 애용해 주세요."
도성은 여자 손님에게 애교스러운 웃음과 함께 살짝 윙크를 보냈다. 그런 도성의 행동이 무례해 보일 수도 있을 텐데, 여자 손님은 아무렇지 않게 가게를 떠났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맘대로 서비스를 드렸네요."
"아니요. 어차피 다른 손님이 안 찾으면 버려야 할 커피였는데요. 그런데 제 빨리 대응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손님이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후 태성은 2만 원을 챙겨 봉투에 넣었다. 사람을 부렸으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저기 오늘 도와주셨는데 제 사례입니다."
도성은 돈 봉투를 태성 쪽으로 다시 밀어내며 활짝 웃었다.
"사장님 그러지 마시고, 차라리 여기서 알바자리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아직 알바를 쓸 정도로 바쁘지는 않은데요."
"오후에 4시간만 일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요. 사장님도 개인 시간을 가질 겸 고용해 주시면 제가 매상도 좀 올려볼게요."
태성은 아까 손님을 대하는 도성에게 살짝 욕심이 났다. 목소리도 크고, 인사도 잘하고, 무엇보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시원시원했다. 호감 가는 얼굴에 애교 있는 윙크가 아직도 태성의 머리에 남았다. 어떻게 저런 태도가 나올까? 도성의 주변 환경이 궁금해졌다. 태성은 손님을 진심으로 대하는 데 자신 있었지만 아무래도 손님에게 먼저 말 거는 게 쉽지 않았다. 어쩌면 도성이 그런 역할을 해줄지도 몰랐다.
"그럼 한 달만 일해 보기로 해요. 나도 알바를 쓰면 매출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 생각해보지 않아서요."
그렇게 태성과 도성은 오후 4시간을 같이 지내기로 했다. 대기업에 다니다가 공무원을 준비한다고 했다. 일하며 공부할 수 있을까? 오히려 태성이 도성을 걱정했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을 끌어내는 매력이 넘칠까? 태성은 자신도 모르게 도성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