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고당기는 라탄백 흥정기
낯선 곳에서 혼자 다니다보면 강하고 단호해 보여야한다는 생각이 내 발걸음을 따라다닌다. 아무도 날 건드릴 수 없어, 그 어떠한 위험도 생기게 두지 않겠다! 라는 보호막을 만들어내는 것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그 날도 나는 약해보이지 않겠다는 다짐에 다짐을 더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표는 주욱 길게 늘어선 수공예품 재래시장. 주말은 아니었지만 전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관광객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큰소리로 흥정하고 있는 그들을 보니 문득 어디선가 보았던 글이 떠올랐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선 부르는 값에 무조건 반으로 깎아야 g한다는 것. 그래. 나는 혼자지만 결코 바가지 쓰지 않을테다.
본격적으로 쇼핑하기 전 시장 전체를 한바퀴 둘러보는 동안, 정말 많은 상인에게서 러브콜을 받았다. 한국인인것은 어떻게 알아챘는지 온갖 인사말과 대사로 구애를 받으니 지난해 남동생과 함께 갔던 제주도 야시장이 겹쳐보였달까. 그러다 마음에 쏙 드는 라탄백(등나무를 엮어만든 가방)을 발견하고 그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주인은 나보다 조금 어린듯한 여성이었고, 마치 오랜만에 보는 사이처럼 정말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녀의 환영은 어떤걸 살지 고민하는 내게 창고에서 아직 뜯지도 않은 물건을 바리바리 가져와서 비닐을 풀어헤치고 보여줄 정도였다. 이것 저것 거울 앞에서 한참을 대보다 드디어 앞으로의 여행을 함께 할 가방을 하나 골랐다. 튼튼하고, 방수가 되고, 수납이 넉넉하며 거기다 예쁘기까지 한.
드디어 흥정의 시간이 왔다. 나는 어깨를 딱 편 채 점원에게 다가가 눈을 또렷하게 뜨고 가방의 가격을 물었다. 그녀는 한결같은 웃음과 함께, "35만 루피아(한화 약 3만원) 입니다." 라고 말했다. 35만? 여기 현지 물가치고는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어깨를 펴고 눈을 부릅 떴어야했나보다. "에이, 너무 비싸요. 그 가격이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어요. 20만 루피아로 해주시면 안돼요?" 반 값으로 깎기에는 왠지 좀 그랬는지 이 정도만 해보자 싶었다. 그러자 그녀는 웃음을 살짝 거두며 "안돼요.그럼 25만에 해줄게요."라고 말했다. 뭐야, 말 한마디로 10만 루피아나 떨어뜨린건가. "25도 비싼데.. 20은 어때요?. 돈 바로 드릴게요. 여깄어요!" 나도 쉽게 물러서진 않았다. 아침에 호텔을 나서며 절대 바가지 쓰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는데, 그 뜻을 굽힐 순 없었다. 한참의 밀고 당김 끝에 그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22만 5천 루피아, 딱 중간 가격을 제시했고 나는 더이상 흥정하다간 온 몸에 에너지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바로 "오케이!"를 날렸다.그래도 이 가격에 이 정도 질이면 나름 성공했다고 우쭐하며 시장을 나섰고, 수납 공간이 큰 가방 덕분에 그 날은 걱정없이 이곳 저곳을 다녔다.
저문해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택시를 잡았다. 창밖을 보며 오늘을 천천히 돌아보고 있는데 조용하던 공기에 기사님이 훅하고 들어오셨다. "아가씨, 이렇게 여행와줘서 고마워요.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2년간 굶다시피하며 정말 힘들었습니다. 가게들도 많이 문을 닫았었고요. 딱 한달 전부터 조금씩 숨통이 트이네요. 기분이 좋아요." 예상치못한 감사에 나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했다. 그러고는 슬쩍 시선이 가방으로 향했다. 이상하리만큼 나를 반겨주던 그녀의 얼굴도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손님일 수도 있는데, 그녀에겐 생사가 달린 일이었을텐데. 괜찮은 가방을 싸게 얻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던 내 모습이 순간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내가 그 순간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환전하고 남은 현금이 처치곤란이라 생각하고 있던 찰나라 그런지 미안한 마음은 어지러이 찰랑거렸다. 싼게 좋은 거란 것. 꼭 그렇지도 않구나, 혼잣말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