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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아 Aug 20. 2022

인상차별

20년째 더위를 느끼지 않는 생활의 달인



오늘도 집을 나선다. 몸이 무거워도 일으켜야하고 휴일이라도 움직여야한다. 비행이 없는 날, 그리고 비행이 짧아 금방 집에 돌아오는 날은 꼭 운동을 가는 편이다. 이렇게 라도 체력을 끌어올려야 버틴다는 생존전략이랄까.


숙소  체육관 문을 여니 보이는  .  명은 러닝머신 ,  명은 매트 위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다. 언제나처럼 들어서자마자 온도를 체크. 에어컨은 두대, 작동중인 에어컨도 두대, 둘다 강풍모드. 이렇게까지 확인하는 이유는 러닝머신  인도 여자아이와  전에 서너번은 만났던 사이이기 때문이다.


 만남부터 강력했다. 보통 체육관 문을 열자마자 어느정도의 냉기가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날은 더운 공기가 콧속에  들어왔다. 에어컨 두대는 모두 꺼져있었고 지금처럼  여자아이는 홀로 땀을 홍수같이 흘리고 있었다. 아이고, 에어컨이 있는걸 몰랐구나 싶어 두대를 작동시키고 러닝머신 위에서 살살 걸으며 몸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고 에어컨을 향해 쿵쿵 걸어가서는 그대로  꺼버리는게 아닌가. 당황, 그리고 황당. 두가지의 감정이 요동쳤다. '뭐지? 나한테 경고하는건가.'


그 후로도 꽤 마주쳤던 것 같다. 내가 들어설때 이미 그 아이는 운동중이었고, 다른 아이들이 있을 때도 있었다. 혼란스러운 부분은, 다른 아이들이 있을때는 에어컨에 손도 못대다가 나와 둘이서만 남게되면 에어컨을 그대로 탁하고 꺼버리는 것이었다. 내 인상이 너무 순한가.


보통 운동을 하고나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개운하다. 하지만 몇번 그런일을 겪으니 답답했다. 솔직한 말로는 화도 났고, 차별에 대한 이글거림도 느껴졌다. 한동안 그 기분에 운동할 맛이 안나다 어느 날 결심했다. 좋아, 이번엔 말을 해보는거야! 이렇게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헬스장 문을 열기 직전, 오늘은 그 친구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괜한 싸움을 만들고 싶진 않았고, 무엇보다 그 험상궂은 얼굴때문에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인생은 늘 그렇듯 그 날 단 둘이 체육관에 있는 기회를 주었다. '좋아.. 정리해보자. 지금 너무 덥고, 운동에 집중이 안된다고 할까? 음.. 그러니까 내가 하고싶은 말은..' 거울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척 마음은 다른데 가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나도 예상못하게 내 입에서 불쑥 나간 말은 "너는 운동할 때 에어컨 트는거 안좋아하는구나, 그치?" 오우 노, 이건 너무 상냥하잖아!


미간을 잔뜩 찌뿌려 눈썹과 눈썹이 거의 천지창조하듯 만나기 직전이었던 그 아이는 순간 예상치못한 나의 질문에 정말 놀란듯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들고있던 덤벨을 슬쩍 내려놓는게 아닌가. 더 놀라운 건, 그 후 나를 보며 정말 수줍은 얼굴로 "응.. 근데 나 15분만 있다가 나갈거라서.." 하고 말을 흐린 것이었다. 아니, 난 저렇게 순한 미소를 너에게서 바란게 아닌데? 같이 놀란 나는 "아, 괜찮아. 나 너 몇 번 봤었어. 그래서 알아."하고 웃어버렸다. 그러자 그 아이도 같이 씨익 웃더니 끄덕였다.


예전에 한 소셜 네트워크에서 봤던 영상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비난의 말을 계속 던졌고, 상대방은 그 말에 반응하기 보다, 오히려 그 자를 따뜻하게 세워주던 실험영상이었다. 그러자 초반엔 자신만만했던 나쁜 말을 하던 사람은 얼마안가 더이상 못하겠다고 포기했다. 아무리 겉으로는 강해보여도 속은 여릴지 모를 일이다. 우리가 한 사람의 야수같은 모습을 만날지, 그 안에 숨어있는 조그만 어린양을 만나게 될지는 우리의 다가섬 또는 반응에 달려있다.


이 후 정말 15분이 지나자 아이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고,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에어컨 두대의 버튼을 꾹꾹 눌러주고 나갔다. 아직도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그냥 넘겨보기로 한다. 옛말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다. 어쩌면 한번쯤 다가서기도 전에 인상만 보고 지레 판단했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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