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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아 Jul 15. 2022

여행은 무엇을 남기는가

혼자가 아닌 두번째 발리


두 번째 발리 비행이었다. 지난번 우연히 알게 된 택시 기사 Mr.마데에게 이번엔 남부 지역을 가보고 싶다고 메세지를 보냈고,  그는 흔쾌히 좋은 가격을 제시해주었다. 하지만 호텔에 도착하니 받은 메세지는 "줄리아, 미안해요. 오늘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쉬웠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몇번의 비행을 걸쳐 이미 내 몸은 변수나 예상치 못한 것들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또 고맙게도  Mr.마데는 대신 그의 딸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빨리 다른 택시를 잡을까도 생각했지만, 일어나는 일들에 그냥 몸을 맡겨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좋아요!"라고 화답.


약속된 장소엔 내 또래처럼 보이는 아담한 여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하얀 셔츠에 끝단이 접힌 긴 청바지. 촘촘하게 층이난 새까만 머리카락과 어색한듯한 미소. 좋은 첫인상이었지만 이런 투어는 처음이란 걸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반가워요 줄리아. 택시를 이용해주어 고맙습니다. 나는 미타에요. 여기는 제 동생입니다. 이름이 어려우니 그냥 꼬마라고 불러주세요." 그러고 보니 그녀의 옆에는 함께 수줍어하며 서있는 앳된 남자아이가 서있었다. 처음엔 남자친구인가? 오늘 둘이 데이트인데 아버지의 부탁에 못이겨 함께 와준건가 라고 생각했지만, 동생이라고 소개하니 아하, 그래 둘이 분위기가 닮았구나 싶었다. 인도네시아에선 집안의 셋째아이를 '꼬마'라고 부른다고 한다. 꼬마라니. 정말 귀엽고 딱 맞는 호칭아닌가.


셋이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후 차를 타고 나의 두번째 발리 여행을 시작했다. 미타의 남동생 꼬마는 운전을 아주 조심조심, 끼어들기도 조심조심하며 수많은 차와 오토바이 사이를 달렸다. 주말도 아니었지만 교통량은 엄청났고, 미타는 오늘과 내일이 인도네시아의 종교적 공휴일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Mr.마데는 오지못한거란 소식까지도. 답답해보이는 도로였지만, 하늘은 참 청량했고 뭉게구름은 아름답게 떠다녔다. 음, 그래. 이거면 됐잖아!

호텔 앞 길_Bali, Indonesia

우리의 첫 목적지는 가루다(새 형상의 신,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신들 중 하나다.) 문화 공원. 공원에 도착해 티켓부스로 가니, 여행자 한명이 티켓을 구매하면 현지 동반자 한명은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덕분에 미타와 함께 들어갈 수 있으니, 예쁜 사진을 가족들에게 보낼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타는 티켓부스에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왠지 아쉬운 말투에 이유를 물으니, 티켓은 공짜지만 내부 셔틀버스는 돈을 내야한다는 것이었다. 셔틀값은 한 사람당 한화로 약 3.000원. 가루다 조각상까지는 1키로가 넘는 거리라 무더위에 걷는 건 무리였다. 입장료가 13.000원이나 되었던걸 생각하면 왜 그 안에 포함시켜주지 않나 싶은 가격이었다. 나 혼자 들어가도 문제없었지만, 공원으로 오는 길에 자신도 가루다 공원이 처음이라며 좋아하던 미타의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 비싼 돈도 아닌데 내가 내주자! 나는 세상 가장 쿨한 표정을 지으며 걱정말라고, 그냥 내가 내주겠다고 했다. 미타는 동그래진 눈으로 연신 손을 휘저으며 아니라고 했지만 재빠르게 결제를 마쳤고, 그녀의 손을 이끌며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함께 가는건 좋지만 미타가 미안함을 느끼는건 원하지 않았기에 괜히 이런 저런 말을 걸며 화제를 전환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Garuda Park_Bali, Indonesia

가루다 공원에는 인도네시아의 신들과 관련된 조각상들과 넓고 깨끗한 풀밭, 미술관, 박물관에 전통 공연까지 즐길수 있다. 공휴일 답게 정말 많은 현지인들이 모였고, 외국인 관광객도 드문드문 볼수 있었다. 내가 조금 더 감상하고 싶어서 멈춰설 때마다 미타는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맞아, 여행 중엔 사진을 남겨줘야지 싶어 "좋아, 나도 찍어줄게!"라고 답한다.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인도네시아의 전통과 신에 관련된 이야기, 문화를 들으며 시간을 꽤 보냈다. 6월말의 땡볕은 이글거렸지만 내게서 이 즐거움을 앗아가진 못했다.


공원 구석구석을 한바퀴 다 돌아본 후 커다란 밀짚모자를 벗으니 머리가 시원하게 트였다. 꼬마는 기다렸다는듯 발리에 왔으면 울루와투 사원을 가야한다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울루와투 사원은 거대한 절벽을 길게 끼고 있는 절이었고, 말괄량이 같은 원숭이들로도 유명하다. 이미 첫 발리 여행 때 지나가던 원숭이에게 한번 당해봤던 터라 괜시리 겁이 났다.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잖아? 문득 미타와 꼬마가 함께 있는 낯선 경험에 감사한 마음이 들어왔다. 당연하다시피 혼자 다녔어도 남모르게 외로웠나보다. 이곳에 예배를 드리러 온 현지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공기중에 신성함도 느껴지는 듯하다. 나도 처음이었만, 두 남매가 눈을 반짝이며 가는게 너무 예뻐보였다. '나도 남동생이랑 제주도에 여행갔을때 너무 재밌었는데.. 불과 몇개월 전이네.' 이런 마음이 들자 왠지 더 챙겨주고 싶단 모성애가 드글드글 끓어올랐다. 그러다보니 자꾸 카메라를 켜게 됐고, 두 남매는 처음엔 어색해하다가 나중엔 자연스러운 미소도 보여주었다.

꼬마와 마테

울루와투 사원의 석양은 정말로 아름답다. 노오란 해뿐인 텅 빈 하늘, 정교한 절벽, 색색의 여름 꽃, 귓가에 들리는 파도와 풍경소리, 잔잔한 공기의 흐름, 경의로움에 가득찬 사람들까지. 아직 떠나기 싫다는 마음이 든다. 함께 바다를 바라보는 두 남매의 머리카락이 땀으로 목에 들러붙은 걸 보니 또다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함께 있어줘서 느끼는 고마움. 젤라또라도 하나 사서 하루의 더위를 다 물러나게 해준다면 참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미타는 혹시 수공예품을 사고 싶으면 공항 근처에 현지인들이 잘 가는 가게가 있으니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여행을 다닐때마다 가족들에게 일말의 죄책감이 들어 뭐라도 사려고 한다. 여기 물리적으로는 나만 있지만, 내 마음속에 항상 가족들이 함께 있다는 걸 잊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엄마와 아빠가 기겁할 것 같지만 내 눈에는 너무 예쁜 발리스타일의 커플옷과 언니와 동생을 위해선 현지 유기농 초콜릿,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 몇가지 소품들을 더 사고 나오니, 가게 맞은편에 '젤라또'라고 크게 써있는 게 아닌가! 차에 짐을 실어두고 잠시 기다려달라고 한뒤, 얼른 젤라또를 세개 사들고 차로 돌아왔다. 미타와 꼬마는 촉촉해진 눈으로 무더운 밤 녹아가는 젤라또를 받았다. 드라이브를 하는 내내 두 남매와 나눴던 대화들, 서로의 꿈, 문화와 가족이야기.. 덕분에 나의 발리는 빈 틈없이 채워진다.

울루와투 사원의 전경

아쉬운 작별 후 호텔에 돌아와 얼른 샤워하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집에 도착했을 미타에게 사진들을 보내주고 또다시 출근. 정신없는 9시간의 비행 후 집에 돌아오니, 답장이 와있었다. "줄리아, 너는 내가 만난 가장 따뜻한 사람이야."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앉아 그 메세지를 읽으니 피로가 잠시 물러갔다. 좀 있으니 Mr.마데 에게도 메세지가 온다. "나의 딸과 아들에게 맛있는 젤라또를 사주어 고마워요. 예쁜 사진들을 남겨줘서 고마워요. 우리 딸이 셔틀버스를 탈 수 있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내가 더 감사한걸요.


여행은 나에게 추억을 남겨주고, 나는 필연적으로 그 곳에 무언가를 남기고 오게된다. 좋았던 여행이란 무엇일까. 내가 즐거운 것? 계획대로 딱 맞아 떨어지는 것? 어쩌면 그게 다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 곳의 누군가에게 곱씹을 행복을 남기고 돌아오는 것일수도.

석양_Bali, Indon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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