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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레 Nov 20. 2024

장면 열, 고구마 품고 달리기

사회초년생의 겨울나기

며칠 전, 이웃이 고구마 한 보따리를 건네줬다. 사실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지만, 누군가 고구마를 준다면 거절하지 못한다. 맛보다는 기억 때문에. 그 시절 감정들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그날도 어김없이 9호선 국회의사당역에 도착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는 찰나, 군고구마 향이 가득 밀려들었다. 곧 다가올 추운 겨울을 알리는 냄새. 노르스름한 조명 아래 가지런히 놓인 고구마는 따뜻하고 아늑해 보였다. 뱃속에서 꼬로록 소리가 났다. 아침을 챙겨 먹었던 적 있었던가. 방송 일에 적응하느라 바쁜 막내작가였기에 밥보다는 무조건 잠을 택하곤 했다.


꼬로록. 꼬로록. 좋아하지 않던 고구마 향기가 그날따라 달달했다. 노오란 군고구마, 세 개에 이천 원. 봉투를 들고 속이 노랄 것 같은 고구마 두 개를 담았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은은하게 퍼졌다. 누군가의 손을 잡은 듯한 따뜻함에 기운이 날 것 같았다. 그 새를 못 참고 가을바람은 기어이 코트 속을 파고들었다. 고구마 봉투를 코트 안에 품고 단단히 여몄다. 온몸에 뜨끈한 온기가 퍼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통통통, 뛰듯 걷다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회사로 달렸다.


그렇게 회사에 가장 먼저 도착해 커피를 내렸다. 왠지 멋진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커피 향이 퍼지는 동안 품속에서 꺼낸 고구마를 한 입에 베어 먹었다. 달큰한 맛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달달함 뒤에 씁쓸함이 입안 가득 퍼지며 눈이 번쩍 뜨였다. '아침을 먹어야 머리가 잘 굴러간다.' 할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어쩐지 일이 잘 될 것만 같은 아침. 사무실에 들어선 동료들에게 평소보다 힘찬 인사를 건넸다.


그날 이후로 나만의 의식처럼 고구마를 품고 달렸다. 사회초년생의 추운 겨울나기. 누군가 고구마를 건네준다면 거절하지 못한다. 사람들 사이로 열심히 뛰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속에 고구마를 안고 달리던 시절을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난다.


영화 <프란시스 하> 장면


PS. 맛보다 기억 때문에 특별해진 음식이 있다면, 오늘은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먹어보는 것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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